독락당 (獨樂堂)
홀로라서 좋아라?
홀로라도 좋아라?
‘홀로라도’는 둘이라면 더 좋을지 모르지만 홀로인 동안에도 그런 대로 괜찮다는 뜻이다.
‘홀로라서’는 둘 혹은 여럿이 함께라면 가능치 않을 것을 혼자이기에 누릴 수 있는 만큼
방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부탁의 뜻도 들어있다.
정말 홀로라도?
그 ‘홀로’는 갖출 만큼 다 갖추었는데 같이 즐길 사람은 없어도 되겠다는 뜻이지
언제 끝날지 모를 사막을 어디로인지도 모르고 혼자 걷더라도의 뜻은 아닐 것이다.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박두진, ‘해’ 중)
거봐, 꼭 사람 아니라도 그럴 듯한 환경이나 교감을 나눌 존재는 있어야 되는 거잖아?
옛적엔 청산, 백운 그런 걸 끌어댔고
글 좀 하면 ‘청산별곡’ version 하나쯤 지었는데
그 시절에는 순수창작물이냐 표절이냐의 문제가 없었을 것 같다.
고승의 오도송(悟道頌)쯤 되든지 갓 쓴 김에 겉멋 들려 따라 하기이든지 그게 그것 같고.
보우(普愚, 1301∼1382) 큰스님도 그러셨네.
白雲雲裏靑山重
靑山山中白雲多
日與雲山長作伴
安身無處不爲家
다른 자연물들을 보탰다고 치자.
내 버디 몃치나 하니 水石과 松竹이라
東山의 달 오르니 긔 더옥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밧긔 또 더하야 머엇하리
五友로 다 될 게 아니라서
假山을 쌓고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은 후에
맘 맞고 어울리기 좋은 사람들 몇을 골라 가까이 두려고 할 것이다.
홀로? 될 일이 아니던데 뭘.
해서 말은 그리해도 속으로는 괜찮은 정인 하나쯤 하고 같이 살고 싶은 거라.
{가상현실(virtual reality)로서라도 말이지.
너랑 나랑(我與汝兮!) 알콩달콩으로
가끔은 ‘외딴 섬’이라는 세트장까지 포함하여.
獨樂堂은 司馬光의 ‘獨樂園記’에서 힌트를 얻어 지었으리라.
사마광은 이미 “與人樂이 아닌 獨樂이냐?”의 시비를 예상하고 변명도 남겼다.
독락원이 부러웠던가 소동파(蘇軾)는 ‘司馬君實獨樂園’을 지었고
훗날 화가들도 독락원 그림들을 남겼다.
독락당은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다.
회재 이언적(1491~1553)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지었다.
외조부께서 源자 항렬의 여강 이씨 25세이셨으니
내 어찌 晦齋(회재) 李彦迪(이언적, 1492 ∼ 1553) 선생을 두고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와보니... 좋기는 하구나, 부럽긴 한데...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도.
‘溪亭(계정)에서’라는 시...
喜聞幽鳥傍林啼 희문유조방림제
新構茅簷壓小溪 신구모첨압소계
獨酌只邀明月伴 독작지요명월반
一間聊共白雲棲 일간료공백운서
숲, 새소리, 시내, 달, 구름... 다 좋은 건데
거기 지은 집이 한 칸 띠집? 그건 아니더라고.
즐기는 사람은 하나
그의 즐김을 위해서 애쓰는 이들은 여럿.
{머슴들, 하녀들, 소작인들...}
달을 벗하여 혼자 따라 마실 때도 있을 것이나
그럴 때 꼭 보고 싶은 이들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고
{옥산서원은 ‘亦樂門’으로 들어가더라고. 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본가에 자주 들리지 않았어도
옆구리 덥히는 이로 석씨부인을 두었다.
그때야 그런 시대라고 하면 할 말 없지.
당쟁과 사화의 와중에 눈먼 칼을 피해 사직하고 보신을 꾀함이 비난받을 이유도 없고.
Noblesse Oblige는 물을 수도 없었다.
한참 내려와서 얘기니까, 어느 정도 민주평등을 맛본 사람들 얘기니까 비교할 건 아닌데
홀로 즐기겠다고 남들에게 수고 끼치지 않던 Henry David Thoreau
‘풀잎 단장(Leaves Of Grass)’같은 건강한 노래 짓던 Walt Whitman 같은 이들 생각난다.
아, 보고 싶어 찾아갔고, 그립기도 하고, 그런 데서 살고 싶다는 얘긴데
‘신 포도는 안 먹어’를 과하게 도리도리하며 주절댄 것뿐이다.
참, 조정권의 <산정묘지>에 自序로 부친 ‘독락당’은 그 독락당 아니다.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
벼랑꼭대기에 있지만
옛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있다는데 가보지는 못했다는 얘기니까
“그렇구나.” 그러고 지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