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표절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씩이야...

외딴 데 가서 자학처럼 찬바람 맞다가

“그래도 사는 게 은혠데...” 정도 느낌이 들면 돌아오게 되는 겨울여행

짝 없다고 못 갈 건 아닌데

징그러운 동창들과 일박이일로 다녀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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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주파수, 전투반경 등이 다르니까

자주 같이 다니던 사람들 아니라면 씁쓸한 기억 한 조각쯤 묻을 수도 있는데

눈길 걸었는데 웬 도깨비바늘? 그런 것까지 일일이 떼어주는 섬기는 손 있어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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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정 들렸는데 “좋다, 그래도 백년 만에 가장 추운 날 보기로는 그렇다”고 딱 잡아떼며

차에서 나오지 않는 이가 차주이고 기사이고 보니... 에고, 꿀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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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다닥 사진 한 장 찍고 간 데? 온천.

나는 70년대 초에 공중탕 다녀온 후로 온천/ 사우나 경험이 없는지라 쭈빗거리며 끌려갔다.

{대장 흰머리 보고 경로우대요금 받겠다니 좀 섭섭, 그래도 공돈 생긴듯한 복합감정.}

엥? 괜찮은 거네!

난 모르는 얘기지만, 물이 좋단다.

‘醴泉’이 ‘단술(甘酒) 예’자, ‘샘 천’자거든.

{‘풍천’으로 잘못 읽는 사람들은 장어 먹으러 다닌 사람들.}

 

열탕과 냉탕 차이라야 15도이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견딜 만하니 한계상황도 아니다.

15cm 차이(165~180)로 winner 와 loser로 원천 분리되는 건가?

범위 안에서 그저 그만하면 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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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안 보니 ‘일박이일’이 뭔지 모를 얘기지만}

밥집, 볼 곳, 갈 만한 데에는 다들 ‘일박이일’이 다녀갔다는 광고판을 붙여놓았다.

일일이 소개할 것도 아니고 삼강주막, 회룡포 사진이나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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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온돌에서 등 지져본 게 얼마만인가, 그렇게 넷이 한 방 쓰고 일어나

찾아간 데가 보문면 미호리에 있는 표절사이다.

대장이 김해김씨 중시조 율은공의 21세손으로 문중 대소사에 큰 힘쓰는 양반인지라

형님인 종손 댁에 들려 대접 받고 뒤에 있는 표절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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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節詞’라는 이름은 충절을 드러내는 사당이란 뜻이니 고유명사랄 수는 없고

조선천지에 그런 이름 쓰는 데가 더러 있지만,

이곳은 고려 말 충의지사(忠義志士) 율은(栗隱) 선생 김저(金佇)와 아들 전(鈿), 손자 두(王+斗)

삼대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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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 왕이 시해당하고 간신들이 발호하고 홍건적이 쳐들어와 개경을 점령하는 등

드러난 정황은 국운이 쇠퇴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육백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독특한 사관으로 평가하거나 대박 연속극으로 꾸밀 얘깃거리가 되었고

우리 시대에도 성공한 쿠데타로 왕좌에 오르는 일들을 두어 번 목격했거니와

먹고사는 일로 허리 필 날 없는 사람들에게는 역성혁명의 유혈극 뒷이야기는 술안줏감일 뿐이다.

그러면 무너지는 사직을 제 한 몸으로라도 버티려다가 눈먼 칼에 맞은 이들은

단지 시운(時運)을 모르거나 줄을 잘못 섰기에 멸문지화를 당해야 했던 것일까?

 

{이씨조선의 통치이데올로기랄까 유교의 도리로서 보자면

조선 건국의 합리성부터 부정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개명천지에서조차 양반 행세하는 가문의 선조들이 이미 잘 정리해놓은 것을 이제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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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저는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남쪽으로 몽진(蒙塵)한 공민왕을 호종(扈從, 어가를 따르며 호위)하였고

그때 보주(甫州, 지금 예천)와 인연을 맺어 훗날 내려가 밤나무를 심고 은둔하였다.

공민왕의 총애로 ‘손(遜)’이라는 이름, 자를 ‘충국(忠國)’이라 얻게 되고(賜名)

예부상서, 성균관대사성, 예문관, 대제학, 공조, 예조, 이조, 전서 등을 거쳐 75세에 대호군(大護君)을 제수 받았고

퇴관을 청하자 풍성군(豊城君)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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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 우(禑)의 유배소를 찾았다가 이성계를 제거하여 국사를 바로잡으라는 왕의 당부에 마음이 움직여

거사를 도모하였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친히 칼을 잡아 역신을 처단하기에는 고령인 85세 때의 일

최영장군의 생질이나 12년 연상이었던 그는 문무겸전한 인물이었다.}

함정에 뛰어 들어간 꼴이 되었으니 잡혀 순국하였다.

갖은 악형으로 모자랐던지 시신을 거리로 끌어내어 참형(尸市之刑)에 처했다.

그때 파랑새가 날아와 시신에 앉더니 “고려충(高麗忠)!”을 세 번 연호했다는 얘기도.

 

당일 정경부인 경주김씨는 목을 매어 순사했고

한림학사요 대제학이었던 아들 전은 식음을 전폐하고 자진(自盡)하였고

손자 두는 벼슬하기를 거부하고 초야에 묻혔다고 한다.

119년이 지나 조선 왕조 11대 중종은 풍성군 율은 선생의 절의(節義)를 높이 평가하여

신원을 복원하고 표절사를 짓고 제향을 받들게 했다고 한다.

1864년에 소실한 것을 1994년에 자손들이 중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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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 잘 받고 나서 인사치레가 아니고...

씨족공동체의 뿌리보전과 우애가 곱게 보여 몇 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