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 시인

 

1

 

‘의사’라는 말은 직업을 가리키기도 하고 경의를 담은 호칭이기도 하다.

Dr. Kim! 우 멋져.

‘시인’도 그런 건지?

김 시인! 촌스럽긴...

 

‘전업 시인’은 다른 직업을 갖지 않은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서 ‘詩作’으로만 먹고산다는 뜻은 아닐 게다. {현실이 그렇다는 얘기.}

그래도 밥벌이 때문에 좋은 작품을 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배우자가 생활비를 책임진다든지 해서 시에 전념할 수 있는 이들을 부러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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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시집 몇 권을 읽어보라고 건네준다.

S의 ‘00서기’ 시리즈...

쪽팔리게스리, 절친이라며 내 취향도 모르셔?

 

“이 시인이 시작만으로 먹고살 수 있었던 유일한 시인이란다. 괜찮아.”

쩝쩝거리며 표지를 들추고 보니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이 시집들은 한국 신시 80여 년 동안 최고 최대의 경이적인 판매부수로 독자를 사로잡은...

김소월의 ‘진달래꽃’, 윤동주의 ‘서시’, S의 ‘00서기’ 순으로 자리매김 된...”

내가 이런 걸 왜...

{이런 걸? 네가 뭔데, 이 시집들이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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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덥다. 요즘 같아서야 나만 참을성 없다는 소리 듣지 않으리라.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밤, 머리가 바위에 눌린 것 같고 온몸이 끈적끈적 따끔따끔할 때

시집을 빼어들었다.

왕짜증 해소에 이열치열을 도입?

 

응? 응! 음~

좋다. 좋으니까 좋아할 것이다.

좋아하면 다 좋은 것?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남들 좋다면 좋은 줄 알지, 많이들 좋아한다는 게 내가 싫어할 이유가 되는가?

대중가요, popular music, 그런 게 다 예술이고 문화니까, 문화부장관, 예총회장 같은 자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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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진 않다. 그래서?

발 씻자면 얕은 물이라야지, 깊은 물이라면 불편하겠네?

그 얕은 물은 깊은 산에서 비롯되었고

다른 흐름들과 합쳐 깊은 강이 될 것이다.

깊은 강에는 들어갈 수가 없고 보고만 좋다고 할 것이다.

{뭔지는 모르지만 뭐가 있을 것 같아 좋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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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밑이 따끔거리는 밤에 시집 몇 권 읽고 나니 아침이다.

밤샘한 걸 보여주려고 입술이 부르텄다.

 

 

2

 

집에서는 그를 변군이라 불렀는데, 친척 누님과 결혼하고는 변서방이 되었다.

한 해 선배지만 생년이 같은데다 군 복무를 한 부대에서 했고 죽이 맞다보니 친구처럼 되었다.

“00이형”이라 부르고.

 

“변학도, 변영태... 거긴 성씨 ‘卞’이고 우리 집은 가 ‘邊’이야.”

누가 뭐랬나, 내 알 바 아닌데...

도대체 너무 말이 많아, ‘辯’씨 아닌가?

한잔 들어간 다음에 쏟아내는 요설을 묵묵히 들어야하는 앞사람은 X통이 된 기분, 그럼 ‘便’씨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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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토론토에 들렀다가 변형을 만났다. 십칠 년만인가?

여전히 쏟아내는 변...

다음날 일찍 떠나야겠기에 그만 일어나자고 하니, 많이 섭섭한 표정.

시집 두 권을 내밀었다.

“내 건 아니고 몇 사람 걸 묶은 건데, 비행기에서 읽다가 두고 내리면 돼.”

{까칠한 아우가 별로 인정하지 않을 것 같아 수줍었던 게다.}

 

토론토에서 시 쓰는 사람들이 만난 건... 그래 이십 년 가까이 되가나보다.

교환교수로 와있던 고 김영태 교수-비평은 했어도 자신도 시작은 처음인-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면서 동인지를 내었던 것이 시작이었다.

세월 지나 떨어져나가고 다른 이들이 붙고 해서 여섯이 헤쳐 모여 동인지 두 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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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제일 잘 쓰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가장 연장자가 아닐까 싶은 우리의 호프 변군은 후기에서 그랬다.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는 작가의 메시지를 담은 완성된 산물로서의 작품이 아니라,

독자의 독서행위를 통해 끝없는 재창조, 즉 끝없는 다시 쓰기가 시작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미흡한 시편들이 독자 여러분들의 상상력으로 다시 쓴 새로운 작품이 되기를 바랍니다.

 

힝, 겸손 떨긴...

맞아, 내가 다시 썼다오.

 

꽃값처럼 형성된 시가가 있어 매수나 편수에 따른 일정 詩代(!)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여럿이 함께 묶으면 더러 詩歷과 詩力(?)에 따른 차이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무렵 그 나이의 기형도 풍 시어들을 가지런히 늘어놓은 것 같은 진부한 지하실의 멜로디도 섞였다.

 

어쩌겠는가?

그래야 하는 게 그렇게 되면 좋다. {당연한 거지.}

다르게 될 수도 있었을 거라.

 

詩垈에 어떻게 지어 올리든지 다 좋은 집-말(言)의 사원(寺)-이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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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Underwood니 공병우 타자기 시절에는 오타 한 자가 속상해서 correction fluid를 사용하다가

흔적이 보기 싫어 한 장을 전부 다시 치기도 했다.

짜증과 졸음을 견뎌내며 새로 친 것에 더 많이 발생한 오타를 발견하지 못하기도 했고.

 

눈이 어두워져서인가, 눈 덮인 마당에 찍힌 새 발자국이 움직이더라고.

시원찮아 덮어둔 것 다시 펴보면 걸렸던 글자들이 꼬물거리며 움직이더라고.

{동작 좋고!}

萬華鏡 있잖아? 조금 흔들기만 해도 千變萬化의 세상이 펼쳐지는.

꽃나무를 배열하고 琪花瑤草(기화요초)를 보탤 것 없이

그냥 그런 꽃밭에서 맴돌면 되지 화엄세계 따로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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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맘에 안 든다며 자꾸 推敲(퇴고)할 것 없고 독자에게 맡기기로 하자.

 

친구 다라이가 건네준 시집, 시가 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시들

좋더라.

변형이 보라고 준 시집에 실린 크고 작은 다른 점들

點描(점묘)의 화폭 곱더라.

 

이름 얻기 전에는 다들 촌놈이었다. {서울 살아도 말이지.}

그러니 문화 활동을 변방에서 한다고 해서 무시할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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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창신동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있는 박수근 화가

 

 

좋아하는 변형, 다음에 만나거든 “변 시인~”이라 부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