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구름 2
복더위로 헉헉거릴 즈음 하루 이틀쯤 살려주듯 선선한 때가 있다.
큰바람 다가오면 다른 피해가 염려된다 해도 일단 시원하잖아?
늦장마로 간밤에도 세찬 빗줄기가 쏟아지다가 간신히 멈춘 터에
푸른 하늘에 둥실 뜬 흰 구름이 눈부신 건 아니나
지리산에서 구름편지로 날아온 소식이 있어 하늘 한번 다시 쳐다보게 된다.
서산대사(休靜) 가로되:
“山自無心碧 雲自無心白 其中一上人 亦是無心客”
-‘題一禪庵壁’-
말 안 한다고 할 말 없는 게 아니고 가만있다고 해서 무정하지도 않다.
{“造物無言却有情”이란 말도 있더라.}
마음 끌리거나 기울음이 없어 無心이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Cf. 소월의 ‘부모’ 중} 에이, 그런 질문이 어딨노?
이렇다 할 이유 없고 생겨나 머물다가 사라짐을 설명할 의무가 없이
저절로 있고 그냥 그렇게 지남.
그러니 그런가보다 하고 눈여겨보지 않음, 뭐 그 정도일 것이다.
뫼 절로 푸르다는데 {푸르자고 그런 것도 아니고}
구름 절로 희다네 {그러고 보니 그런가}
거기 어딘가 있는 (도 좀 닦아보겠다던) 한 사람
그저 그렇게 지나가는 손
남북관계가 지금 같지 않던 시절 묘향산에 들른 적이 있는데
따로 움직일 겨를이 있겠는가, 해본 거라곤 겨우
산등성 하나 넘으며 피어나는 뜬구름 보고 원적암이 어디쯤 있었을까 가늠하다가
박제가가 물수제비뜨며 놀았다는 향산천에 발 담가봤을 뿐이다.
임태희 대통령실장 내정자는 “의원직이든 지역구든 본래 내 것이 아닌데...”라며
“生也一片浮雲起...”를 읊었다고. 씩이나...
生死去來 뿐도 아닐 것이다.
“대체 뭐냐고?”라는 질문을 두고
서양철학은 ‘동일률’을 내놓았다.
A = A, 이음동의어로 정의(definition)하나 새로운 사실을 알림이 없다.
A = B? 말이 안 되는 거지, A가 아닌 것이 어떻게 A가 될 수 있겠어?
Tat tvam asi.
게으른 도사들의 잠꼬대 같은 알맹이 없고 뻔뻔한 선언 말고는 그럴 듯한 대답이 없는 셈.
{Upanishad에 나오는 구절의 해석이라는 게 그렇다. “그대가 그것!” 그게 뭐야?
중학 2학년 때 “That's it.”라는 문장을 읽은 학생이 자신 없는 태도로
“저것이 그것이다”라고 옮겼는데 교사가 그냥 지나쳤다.
“선생님, 그게 아니잖아요?”라고 다른 학생이 지적하자 “네가 가르칠래?” 그러시더라는 얘기.}
‘梵-我’니 ‘전체-부분’이니 ‘不滅-流轉’이니 나누고 나서는
‘그게 그것’이라 할 수 없다.
아무리 잘난 해석이라도 “바로 그거야!”라고 맞장구치기 어렵다.
근원, 본질 같은 것을 窮究하려다가 잘 안 풀리면 조선인은 묘한 말로 피해갈 수 있거든.
건 아니고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뭐냐
참 거시기하네, 거시기라 해두세.
‘Toi et moi’도 그렇다.
‘당신과 나’로 분별하면서야 둘 사이에 저 바다가 없더라도 쓰라린 이별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아니, 합친 적이 없는데 무슨 헤어져 떨어짐의 아픔이 있겠는가?
로미오와 쥴리엣, 트리스탄과 이졸데, 심순애와 이수일, 갑순이와 갑돌이의 ‘와’를 어쩌겠냐고?
그래서?
‘하나 됨’을 도모하다가 절망하지 말고
‘더불어 있음’을 즐기면 되지.
얽히면 즐기고
있을 때 잘하기.
我與汝兮, 에헤요 그대와 나 더불어 에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