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오르는 이유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그런 진부한 말의 약발은 떨어진지 오래다.
이성부 시인
‘茶禪一味’ 식으로 말하자면, 그에게 산과 삶과 시는 하나라고 하겠다.
“왜 사냐건 웃지요”(笑而不答心自閑) 쯤으로 지나가면 될 텐데
물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조차 설명하고 싶은 건
“나 그래서 그렇게 살았다”는 풀이를 남겨야 하기 때문?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추상적인 집단의 고백 말고...
{에고, 초안에 책임 있는 박종홍, 이인기 같은 분들이 내 선생님이셨으니...}
하는 일마다 합목적성을 부여하고 낭비함이 없는 生과 行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겠냐만
산꾼 이성부는 말이 많다.
{노래꾼이야 입 벌려야 하니까 말 많은 게 흉이 될 순 없겠지.}
더 높이 오르려는 뜻은
맑게 눈 씻어
더 멀리를 바라보기 위함이다
멀리 첩첩 산굽이에서라야
나는 내가 잘 보인다
-‘산1’-
산에 다니면서부터 나는 나의 시가
낮은 목소리로 가라앉아 숨을 죽이거나
느리게 걸어가서도 결국은
쓸모없이 모두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키가 큰 욕망은 마침내 무너지고 널브러져서
부스러기가 된다는 것을 산이 가르쳤다
-‘건너 산이 더 높아 보인다’-
그는 또 ‘안 가본 산’에서 그랬다.
안 가본 산을 물어물어 찾아가 오르는 것은
어디 놀라운 풍경이 있는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떤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마냥 흘러가고픈 마음 때문이 아니라
산길에 무리 지어 핀 작은 꽃들 행여 다칠까 봐
이리저리 발을 옮겨 딛는 조심스러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 ...)
로 ‘~아니라’를 길게 늘어놓다가
아직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사랑의 속살을 찾아서
거기 가지런히 꽂혀진 안 읽은 책들을 차분하게 펼치듯
이렇게 낯선 적요 속으로 들어가 안기는 일이
나에게는 가슴 설레는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라고 맺었는데
내 보기엔 ‘~아니라’가 더 좋던 걸.
산길에 무리 지어 핀 작은 꽃들 행여 다칠까 봐
이리저리 발을 옮겨 딛는 조심스러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쯤에서 ‘아니라’를 빼면 된 건데.
내가 가본 산들이 별로 없다.
발목도 부실하고
자가용이 없으니 산 아래까지 닿기도 불편하고
혼자 두고 가면 서운하달 것이고 같이 가면 더는 못 올라가겠다는 아내도 대동해야 하는 등
이제까지 “별로”를 둘러댈 핑계는 많다.
등산용품이라고는 겨우 신발과 배낭을 준비했을 뿐이다.
“악~” 소리 절로 나는 너덜겅을 터덜터덜 내려오는 길에 만난 또래의 한 산객이
“그 나이에 지게작대기도 없이...”라며 등산스틱 없이 다님을 탓한 적도 있다.
발품 팔아 대동여지도 증보판을 내겠다는 것은 아니나
이 뜨거운 달이 지나면 자주 나다니게 될 것이다.
명산 찾아갈 것도 아니고, 백두대간 종주? 그런 꿈 없다.
길 가다가 비탈 만나면 오르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게 되겠지.
지나온 길의 고도가 몇 백쯤이라도 된다면 고개 넘어왔다고 그러리라.
가는 길에 산이 있으니 넘어야 하는 것이지
어느 산을 골라 다녀왔다고 그럴 것 있나?
한참 바라보다가, 우러러보다가
미치지 못할 자리라면 갈 데까지 가다 내려오니까
산에서 산을 내려다보는 경우는 많지 않다.
도종환 시인. ‘접시꽃 당신’을 넘어 진화해야겠지만
가을물(秋水)처럼 눈빛이 깊어졌다고 굳이 롱펠로우 풍의 교훈조가 될 이유는 없겠는데
‘산을 오르며’라는 제목으로 가라사대:
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앉지 말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잰 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 때마다 계획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두 갈래 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당황하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 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오르는 길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고 느끼어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되며
올라온 곳에서는 반드시 내려와야 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산 내려와서도 산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