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만큼 보인다?

 

 

앞에 가는 어린 여자가 굽 높은 구두를 신고 힘들어하는 걸 보고

동행하는 직원에게 “저 칼힐 말이지...”로 얘기를 건네자

그녀는 “그거 킬힐이라고 부르거든요!” 하더니 배를 움켜잡고 새우등이 되어 웃는다.

{내가 실수하거나 뭘 모르는 것을 발견하고는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흥,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거든!” 하는 고소한 표정.}

“근데 왜 ‘킬힐’이라고 부르는 거야?”

“보세요, 저 뾰족한 것으로 찍으면 죽지 않겠어요?”

“글쎄, 그게 무기가 되어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서가 아니라

신는 사람에게 이런저런 고통과 만성질병을 가져오기에 killer heel로 부르게 된 게 아닐까?”

사실 ‘칼힐’로 불렀다고 그리 흉잡힐 것도 아니다.

외국에서는 ‘Stiletto{=dagger} heel’이라고 그러면 다들 알아듣는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나던 해, 아직 경성전기가 전차 운행하던 시절 얘기.

원효로 사시던 함석헌 선생께서 마포 종점에서 타고 종로 쪽으로 나오시려 했던가...

급히 아현동에서 내려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무슨 일로?

발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솟고 있었다.

고무신 신고 다니시는 그분의 발등을 누가 뾰족구두로 찍은 것이다.

테러는 아니고, 주의력 없는 여자의 실수였을 것이다.

 

으 떨려~ 칼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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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초미니스커트나 핫팬츠 차림에 높은 구두를 신어 ‘기럭지’를 늘려 보이려는 시도가 안쓰럽더니만

이제는 무릎을 가린 치마에 굽 없는 신발을 신은 여자를 보면

“무슨 특별한 인생관이라도? 달리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지?”로 언짢은 표정이 되니...

그것 참, 착시현상인가 세태영합/ 시류편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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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를 높이면 눈높이도 달라질 것이다.

{실험이랄 건 아니고 의도 없이 지나간 경험에 “그게 그런 거구나?”라는 나중 생각}

 

내 키는 70대 초쯤 되는데 늙어서 2cm쯤 가라앉았을 것이다.

{최근 검진에서 검사원의 잘못인가 전성기보다 1cm가 늘어난 것으로 기재.

“나야 땡큐다” -지소연-}

잠깐 키가 늘어난 적이 있다. 많이도 아니고 0.5cm쯤.

그런데 세상이 달라져 보이더라는 얘기.

 

친구가 갑자기 ‘점심 회동’-그거 계파 수장 간의 번개팅을 이르는 말?-을 제안했다.

공직에 있어 한여름에도 타이를 풀지 못하는 형편을 고려하여

나도 다림질해 줄 세운 바지, 그러자니 스니커즈 아닌 구두를 챙겨 착용하고 나갔다.

 

이멜다만큼은 아니지만 난 구두가 많다.

고물을 버리지 못하는 악습 탓에 신발장에는 코다리가 켜로 쌓여있다.

그 중 하나, 바지 색깔에 맞춰 갈색 구두를 고르게 되었다.

굽이 닳아 끝부분만 덧대었는데 그래서 0.5cm쯤 높아졌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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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고층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대체 뭐란 말인가?

0.5cm 때문에?

굽을 교정했으니 걷는 자세가 바르게 되어 조금 더 높아졌을 수도 있다. 1cm쯤?

그러면 킬힐 착용 시처럼 12cm 이상을 확보한다면 시각과 시야가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하다.

 

그러니까 높은 구두를 택하는 이유는 롱다리로 보이는 착시현상만 노린 게 아니라

파노라마 조망권 확보와 세계관-world-view(觀)- 향상, 오시(忤視, 傲視)의 즐거움까지 도모하는 것인지?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키 좀 커졌다고 될 일인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할 것이다.

해서 풍진세상에서 뜻을 세운다는 게 고지(高地) 선점과 고지(固持, 死守) 아니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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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높은 자리에 서보지 못해 잘 모른다.

그런데, 넓은 세상 보인다고는 하지만 구석구석 세세한 모습을 실물크기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뜻한 눈으로 이웃의 형편을 살피는 시력 보정이 포대경으로 가능하겠는가?

“나도 지난날 고생 많이 했다”는 무용담을 후렴으로 병창하는 걸로 모자라서

재래시장 카메오 출연으로 동영상 찍었다고 해도 친서민정책 구현의 증거로는 불충분할 듯.

 

‘정책’이 아니고 ‘마음’으로 드러나는 법.

“우리 큰 그림 그려봅시다” 하는 이들의 담합이 아니라

세밀화 풍속도를 들여다보다가 “앗, 저기 나 있네!”로 웃음꽃 피는 이들이 만드는 조화세상.

 

키가 크거나 높은 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정녕 복 있는 사람이겠으나

스스로 낮추기도 하고 내려와서 이웃을 잡아줄 줄도 알아야겠다.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시 113:5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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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cm 높아짐으로 우쭐해졌던 마음을 다스리려는 뜻이었는데

이야기가 어찌 이리 빠지게 되었는가, 단단히 잘못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