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대봉 꽃길 2
어디를 가도 웬만한 도로 곁에는 철따라 바뀌는 꽃들이 줄지어 섰다.
지방자치제도로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부산물이랄까 무슨 ‘꾸미기’는 잘하는 것 같고, 그래서 꽃길도 생겨났을 것이다.
산과 들에 갈봄여름 없이 꽃이 핀다 해도
줄지어 심어놓은 루드베키아, 코스모스, 쑥부쟁이 무더기처럼 집중적으로 화려하지는 않다.
그래도 캐스트에 이름 올리지도 못하는 ‘그 외 다수’도 챙기는 눈으로 바라보면
“저만치 홀로 피어있는” 꽃들 곱더라고.
Jules Batien-LePage, ‘Roadside Flowers’
꽃이 왜 피냐고?
꽃 피니까 꽃이고 꽃이니까 피는 걸 두고 왜라니?
마종기 시인은 ‘꽃의 이유’라면서...
꽃이 피는 이유를
전에는 몰랐다
꽃이 필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누가 물어 보면 어쩔까
꽃이 지는 이유도
전에는 몰랐다
꽃이 질 적마다 나무 주위에는
잠에서 깨어나는
물 젖은 바람 소리
그러니까 이제는 알았다는 얘기?
합리적인 설명으로 설득시킬 수 있으면 ‘理由’라고 하겠지만
그냥 그렇다는데 무슨 이유?
피었으면 지는 것이지 지는데 무슨 이유?
에고, 손상기...
시든지 오래 되었으니 ‘시들지 않는 꽃’이라고 부르는구나?
생태경관보전지역이니까 목책이나 줄로 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 줄 알지만
목장의 소몰이길 같아서 기분은 좀 그렇다.
어쩌겠나, 무분별하게 채취 남획하는 이들을 막아야 하니까.
보기만 하라고? 꽃은 꺾이기 마련.
예쁜 꽃에 가시 있는 줄 알면서도 손이 나가고
잡았던 손 놓으면 시들 줄 알면서도 아프니까 놓아버리고 만다.
“아차!” 이후 줄곧 후회해도 가고 만 것.
꺾지 않아도 시들기는 마찬가지.
선택했기에 포기가 따라온 것.
선택은 끝까지 책임지는 것일까?
포기도 선택이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그건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라는 말.
“더러는 보고파지겠지” 정도로는 미안한 듯하여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라는 기원 놓지 않았다는 말.
그리 감동일 것도 없거든.
정신없이 꿀을 빨던 벌이 뭐라고 그런다.
“밥은 먹고 다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