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비가
이맘때라면 따갑지 않은 가을볕 받으며 능선 따라 걷다가 바윗골을 숨 가쁘게 오르고 나서
“뭐야, 여기가 정상?” 맥 빠지도록 평범한 바깥마당쯤 되는 작은 평지에 앉아
“그렇구나, 다른 봉우리들이 치켜다보네!”를 확인하고는
다가온 하늘을 운전지(雲箋紙)로 알고 마타리 꺾어 붓 삼아 적어내려 가는데
“못 본지 오래 되었구나” 다음에는 쓸 말이 없어 멍하니 앉았다가
언제 받았는지 유효하지도 않은 안부를 기억해내고 “잘 있다니 마음 놓인다만” 보태고는
“그럼 안녕”으로 마무리 짓기 전에 다가오는 ‘왁자지껄’을 피해 서둘러 비켜주고
그렇게 내려와도 쓸쓸하지는 않고 피톤치드 흡수에 세라토닌 분비로 밑지는 장사가 아닌
산길 나서기에 딱 좋은 때가 아니겠는가?
그게 그렇지가 않구나.
아니 웬 비가 이리도?
이때껏 다 말려버리고 태워버리듯 뜨거웠으니 ‘가을장마’라고 할 수도 없네.
가랑비야 내 얼굴을 더 세게 때려다오? 가랑비로야 어떻게 때리겠는가.
난 뭐 자학의 취미나 이유 없으니까 일부러 맞을 것도 없고
그믐 지나 새로 뜨는 초승달 보지 못하는 밤에
쏟아지는 작달비 내다보며 “이 비 그치면...”으로 한가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