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2 시인
지난 목요일 밤(16일) 카페 ‘사카’에서 있었던 ‘천양희 시인 초청 시 낭송의 밤’에 들렸다가
들은 얘기, 떠오른 생각을 막 갈겨쓴 겁니다. {문책 같은 것 없기.}
다탁을 사이에 두고 앞에 앉은 분과 두 시간은 마주봐야겠기에 먼저 사교 트려고 이야기 시작.
“안녕하세요, 조선 블로거이신가요?”
“그게 뭐죠? 난 시 쓰는 사람이에요.”
{아휴, 뜨끈. More 어색 침묵 모드 진입.}
시 쓰는 사람! 그거 좋은 말이다.
사윗감으로 꼽히는 ‘-士’-의사, 판검사, 박사, 등-는 사람이 아니네?
詩人은 ‘사람’인데, 사람이면 됐으니까, 우리 거기에다 ‘님’자 추가하여 모욕하지 말자.
박사님, 판사님, 의원님, 아휴 기사님까지... 그래도 시인님이라고는 하지 말자.
그래, 시인은 시 쓰는 사람인데
시를 좋아하는 사람, 그러니까 시를 쓰지 않아도, 또 쓰긴 해도 발표하지 않은 사람은 시인일 수 없을까?
게으른 이들의 유치한 잠꼬대이겠지만, 해보지 않았어도 들어는 본 얘기일 거라.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음악가? 하면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작곡, 악기, 성악, 뭐라도 못 하니까 음악가 아니지.
화가? 그래, 화가일 수도 있었겠지만, 보여줄 게 없으니까 화가 아니지.
그럼 부른 노래 없어 불러줄 노래 없는데도 시인?
마음에 품고 익은 노래 있으면 빼내봐. 박수 기대하지 말고 크게 불러봐.
듣기 좋아하면 음악애호가이긴 해도 음악가 아니지.
시를 좋아한다고 시인 아니고 시인은 시 쓰는 사람.
시인은 시 쓰는 사람이라고 했다가는 천 시인께 야단맞을 것이다.
“동어반복은 나를 고갈시킨다.”
뭔데 그럼? 시인이 그리 대단한 겨?
하이데거의 말을 빌려오긴 했지만, 하고 싶은 말일 테니까...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짓는 일이고 가장 죄 없는 사람이 시인이다.”
{그려? 죄가 뭐고 죄 없음은 또 뭔지 敷衍(부연) 없는 채 선뜻 동의하긴 좀 그러네.}
그게 ‘시인’의 정의는 아니지만, 아무나 시인이 되는 건 아니라는 메시지는 분명한 셈이다
또 시인이라며 아무렇게나 시를 쓸 수 있겠냐는 경고이기도 하다.
“왜 시를 쓰느냐”는 흔한 물음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폴 클로델 등을 인용하며 시인은 “소외와 고독을 자청한 사람” {시인 아니면? 누구는?}
“시인이 된다는 것은 누구와도 닮지 않는다는...”
“주변에 침묵하는 것들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 등으로 풀어나가셨다.
이런저런 데에 발표한 글들 중에서 이미 밝혀진 내용들이긴 하지만, 그 밤의 육성 가르침이니까...
고통 없는 성장이 없듯이, 고통을 통하지 않고 좋은 시를 얻겠다는 생각부터 말라.
고통을 통하지 않고 좋은 시를 얻겠다는 것은
인생을 절망해 보지 않고 진실한 삶을 알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 시도 내 삶의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
그때의 시는 절실하고 진정한 내 삶의 다른 모습이다.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
파도는 하루에 70만번이나
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내 몸을 쳐서 시를 쓰나
-‘벌새가 사는 법’ (전문)-
쌀이 농부들의 손을 여든여덟 번이나 거친 뒤에 밥이 되듯이
한 편의 시를 완성하려면 수십 번이나 파지를 버려야 하는데,
그 과정과 완성이 시인에게는 괴로운 기쁨이라고 그러셨다.
그 옛날 추사(秋史)는
불광(佛光)이라는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버린 파지가 벽장에 가득했다는데
시(詩) 한 자 쓰기 위해
파지 몇 장 겨우 버리면서
힘들어 못 쓰겠다고 중얼거린다
파지를 버릴 때마다
찢어지는 건 가슴이다
찢긴 오기가
버려진 파지를 버티게 한다
파지의 폐허를 나는 난민처럼 지나왔다
고지에 오르듯 원고지에 매달리다
어느 땐 파지를 팔지로 잘못 읽는다
파지는 나날이 내게서 멀어져간다
내 손은 시마(詩魔)를 잡기보다
시류와 쉽게 손잡는 것을 아닐까
파지의 늪을 헤매다가
기진맥진하면 걸어나온다
누구도 저 길 돌아가지 못하리라
-‘파지’ (전문)-
한번 비틀어보자는 꼬부라진 심보로 하는 얘긴데요...
부수고 깎은 대리석 부스러기가 늘어날수록 彫像(조상)은 제 모습을 더욱 드러내게 되겠지만
낭비한 대리석이 많다고 해서 작품의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는?
{참 못됐지요? 그래도 시인을 향한 제 눈에서 敬慕(경모)가 떠난 적은 없었습니다요.}
‘그믐달’이라는 시는 어머니 생각으로 단번에 써내려가 30분 만에 완성했지만
다른 시들은 여간 애쓰고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며
‘직소포에 들다’만 하더라도 1979년 여름 부안에 들렸다가
‘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직소폭포와 맞닥뜨린 체험 후 13년이 지나서야 나왔다는데
{그 시가 시집 「마음의 수수밭」에는 88쪽에 실림. Remember ‘쌀 米자’의 뜻?}
몇 년 걸려 완성한 시라... 그동안 뭘 어떻게 했는데?
切磋琢磨(절차탁마)? 닦고 조이고 기름칠?
오랜 鍊成(연성) 끝에 名劍寶刀(명검 보도) 하나 뽑아냈는지?
그저 예정일 지났기에 자연분만으로 어려워 끙끙거리다가 씨쎅(cesarian section)으로 나온 큰아기인지?
있을 법한, 그래서 일어났던
잊을 만한, 사실 디테일은 다 기억나지 않는
잊고 싶은, 그래도 잊지 못하는 대목도 있고
그런 것들 잘 챙겨 넣은 것도 아니고 다락에 그냥 던져두었다가
어느 날 꼭 뭘 찾으려고 문을 열었던 것도 아닌데
“아니, 무진장의 보화가 있는 것도 모르고”라는 마음으로 꺼내놓기 시작
버리는 것 조금
안방에 두거나 소지하고 다닐 건 아니라도 쓸데 있을 것 같아 다시 넣어두는 것 많음
곰팡이와 녹을 털고 닦고 보니 아주 괜찮은 것들 몇 개
그 중에서 하나 골라 달고 나온 브로치
나는 뭘 붙잡고 끝장 보지 못하기에 도무지 이룬 것이 없는 사람인지라
혼자 주절대는 자기비하의 투덜거림이니까 신경 쓰지 마시길.
{하긴 뭐 ‘詩仙’ 쯤 된다면 말이지요, 그러니까 杜甫와는 달리 李白의 경우에는
한달음에 토해내고 아무 推敲(퇴고) 없이도 명품을 양산하더구먼.
‘시아기’-순화한 말 씁시다- 필요 없다는데도.}
몇 해 전 「불교문예」에 실린 ‘도공의 말’에서도 그랬다.
백자가 마음 빚는 일이라면
우리도 제 삶을 빚는 도공들이라고
달빛에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꽉 찬 삶을 사는 일이라고
사는 일이 먼저이고 만드는 일이 그 다음이라고
도공이 말하네
그리고 「너무 많은 입」에 수록한 ‘도공 시(詩)’에서 또 그랬다.
어느 도공은 흙을 빚어 백자를 얻었다
흙을 빚을 때는
마음자리부터 살피고
맑은 혼을 당겼다
숨은 흙을 찾아 떠나고
숨은 흙 찾아 돌아왔다
시 짓기는 마음을 빚어 백자를 얻듯 하는 것.
뭘 덧붙일 게 없어서가 아니라 도공으로서는 더 할 게 없으면 완성된 것.
완성된 것? ~이라 생각해도 가마에서 태반은 龜裂(균열)되더라고.
백자는 container가 아니니까, 흠 있는 것을 “이만하면 됐다”고 남겨둘 수 없을 것이다.
백자는 최상에 이르지 않은 차선을 깨부수어 버림으로써 “다 이루었다!”로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많이 버려야 하고 파지가 쌓여야 한다는 말 이해할 만하네.
십 수 년 걸렸다는 말은 오래 묵힌 술 같다는 뜻도 아니고
수없이 반복한 실험과 끊임없는 개작 끝에 완성도를 높였다는 뜻도 아니고
“헠!”하는 깨달음{satori, 悟り}으로 드디어 튀어나오게 되었다는 뜻일 게다.
{앞서 ‘오래 걸린 시’에 딴죽 걸고 어기댐을 사과합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
그리고 詩는 말(言)의 절(寺).
그러면 시인은 祭官이겠네.
부와 권력을 지니지 못했더라도 사제라면 ‘Reverend’라고 높여 불러야겠네.
시인이 저를 두고 용맹정진하는 수행자이고
잘 때에도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깨어있는 정신으로 치열하게 시에 매달린다고 그래도
나는 이죽거리지 않을 것이다.
시인이 “내 겪은 고통 누가 알랴” 그러면 숙연한 표정 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내뱉음으로써 아픔이 줄어들을 수 있다면 그 아픔 별 것 아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