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3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마음의 달’) 그랬는데
“들판 한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그랬는데
긴 연휴는 고맙지만 비 오거나 흐리거나 해서 정작 추석에 달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대.
비오는 밤 내가 보지 못하는 거지 달은 떴거든.
남부지방은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라니
곳에 따라서는 오늘밤 맑은 하늘을 흐르는 밝은 달을 보겠네.
남들 보는 달을 보지 못한다고 나만 화나겠냐고?
내게 보여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달도 속상할 것이다.
형편이 그런 걸 어쩌겠나, 사나흘 지나 좀 이지러진 후라도 보게 되면 보자.
가장 아름다웠을 때를 기억하니까, 언제 보더라도 그렇게 아름다울 것이다.
표제시 ‘마음의 수수밭’ 뿐만 아니고, ‘마음의 달’, ‘마음의 지진’, ‘마음의 경계’, ‘마음아’, ‘마음에 점 찍기’ 등
‘마음’이 여기저기 흩어졌더라고.
‘마음’이란 뭘까?
(1) “마음 좋은 아저씨”에서처럼, 본래부터 지닌 성격이나 품성.
(2) 생각이나 감정이 생기거나 자리 잡는 공간. “마음에 두지 마” 그러기도 한다.
(3) 어떤 일에 대하여 가지는 관심. “어쩐지 맘에 들어 그이가 나는 좋아.”
(4) 무엇에 대하여 감정을 느끼거나 생각과 의지를 일으키는 작용이나 태도.
모든 정신작용은 마음이 일으키는 것이다.
애증은 마음이 짓는 것이다.
김광섭의 시 ‘마음’, 현대감각으로는 “피식~”의 첫 연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그것은 영향을 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것이었다.
김동명의 “내 마음은 호수요... 촛불이요... 낙엽이요”에서도 그렇고.
그런 마음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게 됐는가
‘위험’ 표지 없는데도 조기경보시스템이 저절로 작동하는 건지
마음아
아무 곳에나 너를 내려놓지 마
어디나 다 사막이야
마음아
아무 곳에나 들어가지 마
어디나 다 늪이야
-‘마음아’,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아무 곳에나 내려놓지 않고 아무 곳에나 들어가지 말 마음인데
그 밤에 시인은 마음을 여셨다고 그러대. {나 떠난 후 뒤풀이에선가?}
그렇지 뭐,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니까. ‘그래도 사랑이다’라고.
상처받음을 예감하면서도 가드를 내릴 수밖에 없더라고.
자연치유력이라는 게 있어도 의지적인 노력은 필요하다.
보통은 ‘절망’이라는 배양토에서 생명의 싹이 자라더라고.
그러니까 시작은 철저한 자기부정이고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여행의 한걸음 내디딤이더라고.
그렇게 가다가 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러 벽을 만나게 되는데
넘어서면 좋고, 궁리하다가 날 수 있는 초능력을 얻기도 하고
돌아섰다고 하더라도 이미 살기로 작정하고 회귀하는 거니까
그 ‘나갈 데 없음’과 맞닥뜨림은 탈바꿈(脫殼)과 벗어남(脫却)으로의 초대였던 거네?
‘마음의 수수밭’이 그랬던 거지?
‘직소포에 들다’도 그런 거였고?
서걱거림, 일렁임, 그러다 꺾임, 곧추선 듯해도 작은 바람조차 감당 못하는 수숫대
촘촘해서 캄캄한, 그러면서도 채워졌다기보다는 빈 것 같은 수수밭
응? 거기서 뭐가 보이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에 오르니, 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마음의 수수밭’-
몇 편 낭송했지만 다 언급할 건 아니고, 그 직소폭포 말인데...
거기가 세상 끝은 아니지만, 아무튼 장엄한 수직과 만나게 되었다.
{누워 입적한 시달타와 서서 하늘로 돌아간 예수, 어느 편이 더 어떻다 할 건 아니지.}
수직의 위엄과 적대 앞에서 짓눌리기도 하고 한없이 작아지지만
회귀하는 연어가 죽을힘 다하여 거슬러 올라가듯 부딪혀보고 싶은
그러니까 La Forza del Destino에 개기겠다는 깡다구?
그런 게 아니고, 아무래도 억울해서 直訴하렸는데
“그럼 당장 올라와볼래?”라는 直召에 “아뇨, 아직 그렇게까지는...”으로 한 발 빼게 되었고
“여기 直沼 괜찮네! 피안이 어디 따로 있겠어요?”로 安心한다.
아, 먼저 ‘소리’가 있었구나. 소리가 산을 깨우고 다들 움직이게 했지.
그리고 흩어지는 물방울들, 사소하고 미약한 것들의 투명함과 프리즘으로 水宮을 들여다본다.
{이제는 입자냐, 파장이냐 따위 논쟁 없겠지? 물은 알로 이루어졌고 흐름은 알의 움직임.}
하, 쪼그리고 울 일 없다.
노래할 이유 있네. 노래하며 살 이유 있네.
나는 다시 배운다
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골목에 잘못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무안한 기색으로
Paul Valery를 인용, 한 구절 툭 떨어트린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Le vent se lève! Il faut tenter de vivre!)
이상 시인은 살아 돌아가 살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던 것이다!
「너무 많은 입」 후기랄까, ‘시인의 말’이 이랬다.
시 생각만 하다가 무엇인가 놓쳤다
놓친 것이 있어
시 생각만 했다
시 생각만 하다가 무엇인가 잊었다
잊은 것이 있어
시 생각만 했다
시 생각만 하다가 세상에 시달릴 힘이 생겼다
생긴 힘이 있어
시 생각만 했다
그토록 믿어왔던 시
오늘은 그만 내 일생이 되었다. 살아봐야겠다.
나도 국적문제 해결되면 지공파인 셈
몇 해 연상이시니 시인은 이제 “人生七十古來稀”를 바라보시는데
李奎報의 ‘詩癖’은 축복인지 저주인지 몰라도
詩魔에 잡히셨는데 어쩔거나 계속해서 쓰실 것이다.
시는 살리는 힘.
시 짓기는 살리는 일.
시인은 살리는 사람.
시시한 얘기, 그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