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이야기 4
내게는 기념품이 없다.
대청 뒤주 위에 아무렇게나 놓였던 분청사기, 철화백자 같은 것들 다 어디로 가버리고
시인, 묵객, 화백, 수석애호가가 호의와 우정의 표지로 건네줬던 것들
어머니의 수적, 아버지의 성경, 첫사랑이 쥐어준 신물
남은 게 없다.
나한테 뭐 주지 마.
간수하질 못 하니까.
좋은 걸 보고 “아 좋다”하면 되지 왜 가져가려고 해?
이근배 시인이 멋 부린 시 ‘모자를 벗고’ 있잖아
아무렴 시인이 돈 주고 뭘 살 수 있겠어?
제 손에 들어올 뻔했다가 날아간 추사가 아까워서가 아니고
귀한 것 얻으려고 필요한 것 버리지 못한 게 부끄럽다는 얘길 거라.
사랑땜의 의미를 안다면 안 가졌어도 그만인 것도 알겠네?
글씨는 더더욱 모르고
붓도 제대로 못 잡으면서
秋史, 그 높은 다락을
목이 빠지게 올려다보고 다녔다
더도 덜도 말고 예서(隸書) 한 점만!
턱없는 소원 갖던 내 눈에
어느 날 인사동 골동가게에서
―築屋松下 脫帽看詩
(소나무 아래 집을 지어
모자를 벗고 시를 읊는다)
여덞 글자가 번쩍 띄었다
낙관이 없어도
추사가 아니고는 흉내도 못내는
신필(神筆)이거니
나는 덥썩 품에 안았다
―내 언제 모자를 벗고
시 앞에 서 본일 있었던가
헛되이 종이에 먹물만 칠해온
부끄러움이 앞섰다
사랑땜도 하기 전에
글씨는 남의 손에 넘어갔지만
―모자를 벗고,
그 말씀, 내게는 못다 쓸
천금(千金)으로 남아.
모자 벗고 살펴보는 경건이야 좋은 버릇이지만
에헤, 뭐 그리 존귀한 게 있겠냐?
이 세상 모든 것 사라져도~♪
뭐 그런 돌림노래가 있기는 했지.
가지 않는 것, 영원히 사는 것? 없지.
司空圖의 「二十四詩品」인가는 잊어버리고
詩? 좋다고 벽에 목매어달듯 할 게 아니고
소나무 아래 집짓는다는 얘기 말인데
노후대책이니 별장이니 하며 勝地에 집 따로 가진 사람들에게
내가 부탁하는 게 아니고
아쉬워 청원할 쪽은 저들이지 싶은데
裨補風水는 뭘 세워서 되는 게 아니고
바람 같은 사람이 들려 기운을 듬뿍 뿌려 갈무리해줘야 하거든.
나 한번 불러봐
오라는 데 없어도 골라 가는 사람이라서...
그리고 노래 말인데
시가 넘쳐나는 세상인데 뭘 더?
내 노래 짓지 않고 남의 글 즐기면 되지.
그리고 가지치기, 꽃 훑기, 열매솎기로 좀 줄여보자.
{그래야 알 굵고 때깔 고운 명품으로 상품성을 높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