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단풍 소식
엠마오로 가는 길’은 정작 나무가 없을 성 싶은데 동명의 명화는 숲길로 그렸다.
비선대 가는 길이 딱 그래서 양 옆에 나무가 많은데다가
차 다닐 정도는 아니더라도 여럿이 나란히 걸을 만큼 넓다.
청이 아버지가 지팡이 없이도 갈 수 있는 편한 길이다.
어디라도 싸가지 없는 부류 몇은 끼기 마련인데 그런 이들 피하자면 갈 데가 없다.
등산스틱은 뭘 하겠다고 가지고 다니는지
어떤 인간이 작대기 휘두르는 본새가 명성황후 시해하던 낭인들이 칼 날리듯 해서
그러다가 사람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주의를 줬더니 빡빡 기어오르네. 거 참.
일행이 더 갈 수 없다고 버텨서 비선대에서 기다리라고 남겨두었다.
국립공원 레인저 말로는 단풍이 천불동 계곡까지 내려왔단다.
양폭산장까지 3.5km, 갔다 오기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너무 긴 거리.
금강굴까지는 0.6km, 내설악으로 넘어가는 길 오르다보면 핏빛 병풍이 보이리라 생각하고 택했다.
우와, 그 짧은 길이 그렇게 가파르고 험할 줄이야.
올라가보니 적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남하하는 군단을 저지하겠다며
바위틈에 삐죽삐죽 돋아난 “독야청청하리라”는 세력이 여전히 뻗대고 있다.
금강굴 바로 아래 좁은 바위에 버섯 돋아나듯 스위스 사람들이 이십여 명 몰려 앉아있다.
몇 마디 상대해줬더니 샌드위치를 내민다.
인사차 한 입 베어 물고 내려오는데, 앗! 배가 사르르 아파온다.
이 무슨 황당 시추에이션? 그러잖아 다리가 후들후들한 데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다.
올라오던 소년들마다 묻는다. “아저씨, 얼마나 더 가야 돼요?”
‘할아버지’라고 하지 않은 건 괜찮지만, 휴~ 상황이 그런지라 웃음 짓는 얼굴로 대답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만남의 광장’인가에서 기다리던 이는 내 하얗게 질린 얼굴 보고 웬일이냐고 걱정한다.
‘단풍 소식’이라 했으니 일단 정리해봅시다.
(1) 오년 만에 가장 고운 단풍을 보게 되리라는 예보.
(2) 하루 50m씩 밀고 내려오는 赤軍, 천불동 계곡에 교두보 확보.
(3) 20일께는 설악동도 점령당할 것이 확실함.
(4) 새치 돋듯, 내부교란 차 침투한 공작대가 준동하듯 군데군데 물든 가지들이 눈에 띔.
그냥 철수하기는 아쉬웠다.
양양에 들려 약수로 지은 돌솥밥과 소문난 집 커피 챙겨들고 한계령으로 돌았다.
히야, 어쩌면!!!
굽이굽이 돌고나면 또 다른 절경이 다가온다.
한계령 정점에 있는 휴게소 도착 시각이 5시 45분.
종일 흐려 그럴 듯한 사진 얻지 못한데다가 이미 어두워졌으니...
하긴 인증샷 한 장 정도 있으면 됐고 좋은 그림이야 화보작가들이 만들지 않겠는가.
문정희 시인이 한계령을 넘다가 눈에 갇혀 어쩌고... 라는 노골 표현 좀 그렇다만
와보니 기분은 알겠네.
장사꾼도 아니고 단풍나들이라며 미시령터널로 내빼는 이들 이해할 수 없다.
인제에서 오색약수 거쳐 한계령 너머, 중간에 쉬기도 하고 산길도 걷다가
양양 거쳐 속초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
백담사에서 올라 봉정암, 중청 거쳐 대청으로 오르는 산꾼들이야 우리하고는 아예 다른 사람들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