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갔구나

 

수요일 여행에서 돌아오니, 목, 금, 월요일에 잡힌 특강 일정이 사나운 기세로 다가온다.

{돈 되는 일도 아닌데, 아직 쓰임 받음에 감사할 뿐.}

빌린 차로 한국에서 첫 운전하기가 쉽지 않아 엉기며 시흥에서 돌아오는데 들어온 전화.

찍힌 이름 보고 “아, 잘 지내는가, 건강은 좀 어떻고?”로 받으니 “저, 동생입니다.” 그러는 것이었다.

그럼 동생 아니고? 그러고 보니, 내가 아우로 삼은 벗의 동생이라는 뜻.

“형님 좀 전에 가셨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

“형님 12시에 운명하셨다고요.” 아니, 왜?

 

“내 그럼 자네를 아우라 부르겠네.”라고 한껏 호기부리긴 했지만

어려워 함부로 말도 놓지 못한 사이였고, 형 노릇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가고 나서 ‘아우’라 부르는구나.

 

한때 실의의 시절, 시간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 몰라 사이버바둑 사이트에 접속한 날

고수라서 석 점 깔고 시작했지만 피차 성의 있게 두지 않으며 심드렁한 채팅이나 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지은 내 아이디가 ‘lotus’였던가, 호명을 연꽃으로 지은 이유가 무엇이냐며

그는 周濂溪(주렴계)의 ‘愛蓮說(애련설)’을 좋아한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루돌프 오토의 ‘누미노제’를 우리말로 뭐라 하면 좋겠냐며 내가 물었다.

그는 좀 있다가 ‘지핌’이라고 대답했다.

{후에 그는 내가 그렇게 묻는 순간 몸 전체가 전율하는 신비체험을 했노라고 술회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교제는 띄엄띄엄 이메일을 교환하며 이어졌다.

 

아우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지병이 있어 공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어른은 소학교 訓導이셨으나 재야학자 급(?)의 지식인이셨는데

이상한 편견으로 자식을 학대하면서도 home schooling으로 한학과 상식의 기초를 닦아주셨다.

신부전증, 극심한 전신통증 등으로 다락에 ‘죽은 듯이’ 누워서 살던 청년기에

독서와 음악 감상으로 이런저런 교양을 쌓았다.

무교회주의 성경공부에 나가보기도 하였으나 만족을 얻지 못하였는데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며 요한복음을 특히 애독한다고 그랬다.

그가 읽고 생각했던 책들, 비트겐스타인, 불트만, 하이데거, 쟈크 데리다, 등을 들먹이며 나를 전방위로 압박했다.

몇 안 되는 가깝던 사람들 중에는 교수, 예술인들이 있었고

철학박사의 학위논문을 지도한 적도 있었다나. {잘 된 사람은 그 일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언젠가는 ‘막사발’에 숨겨진 코드 해설집을 내는 게 소원이라고 그런 적도 있다.

그런 몸으로 도로 건설 인부나 페인트공원으로 일한 적도 있으나 지속적인 경제활동은 별로였는데

꽃 같은 아내를 만나 딸도 얻었고, 부인이 그럭저럭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렇게 살면서 새 치료방법의 ‘실험 대상’이 되는 조건으로 비용 부담 없이 수술을 받기로 했는데

열고 보니 심장동맥 세 개가 다 상해 있었고 조직이 괴사상태여서...

뭐 그런 얘기 자세히 할 것도 없다.

9월에 부산 내려가면 ‘산성막걸리’를 대접하겠다고 그러더니

몸이 그런 상태라 “좀 있다 오시소” 했는데, 그만 내가 찾아가보지 못했다.

 

어제 강의 마치고 늦게 내려가 그때서야 입관식을 했다.

아침에 발인, 영락원에서 화장, 정관에 있는 추모공원에 안치되었다.

버스를 빌렸는데, 타고 간 사람은 셋.

 

화구에 들어가기 전에 ‘지핌’이라는 화두를 사람들에게 던졌다.

 

애석하다. 원통하다.

하늘을 두고 뭐라 하지는 않겠다.

불쌍한 아우, 이제 잘 쉬리라 믿는다.

자네에겐 잘 된 거네.

 

事態가 지난 후에는 價値가 남는 법.

아름다운 기억과 소중한 가치로 아는 이들의 마음과 하나님의 대뇌피질에 저장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