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언저리
칭기즈칸 군대의 진격 속도를 넘어서자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다닐 건 아닌데
그래도 3도, 4군, 1시를 특정종교의 극렬 신자들이 땅밟기 하듯 지나쳤다.
빌린 차 반납하기 전에 지리산 언저리를 둘러보고 싶었던 것.
{그런데 함양-남원 간 88고속도로는 단일차선에 제한속도 80km인데
110km로 내빼도 뒤에 붙은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거나 경적을 울려대니 어쩌란 말인가?}
품이 넓어 모두 거둘 수 있었던 것일까? 빨치산과 토벌대원과 양민을.
소속이 그러니 총구를 들이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그렇다고 치고 주민들은 왜?
거기에 살았고 떠나지 못함이 죽을 죄? 그걸 몰랐던 죄목을 추가하여 삼진 아웃
이름 없는 총알이야 “Nothing personal~”하며 생명을 관통했던 것이다.
단성면을 지나면서도 방곡 마을에 있는 산청 함양 양민학살 추모공원에 들리지 못했다.
오는 봄 산청삼매를 만나러 가는 길에 찾아볼까 한다.
통영 가고 돌아오는 길에 산청읍과 뱀사골에서 하룻밤씩 묵는 동안
대원사, 중산리, 남명 유적지-산천재, 덕산서원-, 단속사지, 남사 예담촌, 실상사...를 들렸고
둘레길 조각씩 띄엄띄엄 걷기도 하고 노고단에 올랐다.
노고단 언덕에서 가깝게 보이는 반야봉
아침안개 걷히지 않아 멀리 있는 천왕봉은 잘 보이지 않는다
“너 그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골로 가는 수가 있어”라는 공갈은
대원사골로 들어간 이들 중에 살아 돌아온 이들이 없어서 나왔다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유평마을로 해서 윗새재마을 너머로 이어진 골은 길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끝이 있을 것이고 그 끝은 골의 시작이며 천왕봉 근처일 것이다.
대원사 계곡
새재마을에 놓은 벌통
“정상 정복의 등산문화를 길을 따라 걷는 문화로 바꾸자”며 지자체마다 둘레길 만들기에 열 낸다고.
그러네 뭐, 형편대로 사는 거지 백두대간, 적어도 지리산 종주 못했다고 열등감 지닐 것도 아니네.
굳이 천왕봉을 디뎌보고 싶다면 당일에 중산리 탐방지원센터 출발로 가능할 것이고
법계사 가는 신도 실어 나르는 버스까지 얻어 탄다면? 컨닝 수준이긴 하지만 어려울 것도 없다.
중산리에서 바라본
언저리 맴돌고 그림자나 밟고 옷자락에 손대려다가 제풀에 놀라면서
언제 안아볼 수 있을지?
호기심의 부싯돌이 욕망의 불꽃을 일으킨 게 아니고
열림과 나눔의 소원이 전달되고 허락된다면 더 큰 품이 인력이 세니까 먼저 부를 것이다.
지리산과 그렇게 눈인사만 나눴다.
실상사에서 바라본
큰 산은 보여줄 게 많으니까 행락객이 그치지 않고 찾을 것이다.
꽃과 단풍, 그 환한 빛이 한창일 때 인파에 휩쓸렸다가 밟힐 것만 같아 끼어들지 못했다.
그랬는데... 일요일 저녁 나가는 차들만 줄지어선 길에 들어가는 차는 한 대
그렇게 뱀사골에 가서 절정을 보았다.
독채 혼자 쓰듯 조용한데 몇 시간이나 잤는가
외등도 없고 “휘엉청 창문이 밝으오”는 아닌데 희읍스름하다.
하현을 지나 그믐달에 가까운 逆(역)아치와 별 몇 개, 그 희미한 빛이 들에 찼다.
저물 때는 해 떨어지기 전에 어둠이 내리지만
해뜨기 전, 동녘이 뿌옇기도 전에 殘月曉星(잔월효성)은 산길 비추기에 넉넉한 빛을 내리는구나.
{부지런한 농부와 연인의 오해를 풀어주지 못한 사람은 이쯤이 사립을 나서는 때.}
꼬불꼬불 심원 마을 지나 성삼재에 오르니 차들 몇 대 있네?
왕복에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고 속여 아내와 함께 노고단 언덕에 올랐다.
바쁜 걸음이었지만 그만해도 시간에 쫓기지 않는 며칠이었다.
등 뒤에 둔 지리산이 이미 멀어졌는데도 아기 업은 듯 무게가 느껴진다.
휙 둘러보고 서둘러 떠나는 사람도 축복하는 것은
가슴속에 안고 살던 이를 다시 찾을 줄 알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