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모시기

 

 

외증조모, 까마득 연세 높으시고 몇 세대 차이가 나는데, 나와의 관계는? ‘왈개’였다. 나를 ‘대왈개’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야 어른께서 귀여워하시는 여동생을 놀리며 괴롭혀서인 줄 안다. 뭐 그 어른-흠, 이름도 기억하지, 이경선 할머니- 얘기 하려는 건 아니고, 한때 한 집에 할머니가 세분 계신 적도 있었다는. 방 두 개, 나중에 방 하나 늘어 셋이 되었지만, 거기서 같이 기거하는 식구? 보자, 아래로부터 꼽아 육남매에 부모님, 외조모, 조모, 외증조모, 거기다 ‘식모’로 지칭되는 외인, 해서 열둘이 살았네. 큰 산 대피소인가에서 하룻밤 묵자면 금 근 좁은 칸에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데, 그때 여럿이 한 방에서 자자면 일인당 할당 면적이 음 두 자 너비도 안 되었지. 거기다 학생들 있으니 책상까지 들여놓았고. 다시 ‘할머니’로 돌아가자면, 그 세 분 오래 사셨는데, 모두 치매니 그런 데로 빠지지 않고 끝까지 깨끗하셨다. 어머니께서 먼저 가시며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고 그러셨는데, 아, 외할머니는 사위와 함께 사시며 부엌을 지배하고 싶으셨나보다. 구십 노인이 요리책을 보며 ‘맛있는 요리’를 해주려고 하셨고, 그러다가 “아고 내 정신 봐라” 했을 때는 음식과 냄비로 끝나지 않고 집을 홀라당 해버릴 위기가 여러 번, 또 그 음식이 뭐 그리 맛있었겠나, 해서 아버지는 절레절레. 그래서 미국 사는 작은 누님이 외할머니를 모셔갔다. 거기서 몇 해 사시며 백수를 누리셨다. 혼자 남은 아버님은 그렇게 이십 년 가까이 사셨는데, 마지막에는 “내가 죽어가도 오지 않을 거냐?”는 최후통첩처럼 채근하셔서 나는 환갑을 세 해쯤 남겼던가 공직을 아주 접기에는 이른 나이에 처자를 남겨두고 혼자 들어와 20 개월쯤 모셨다. {모시기는 뭐, 인상 찌푸리며 한 아파트에 산 것일 뿐.}

 

이제는 그처럼 여러 세대가 같이 사는 집이 별로 없을 것이다. 수준이 천차만별이겠는데 누구나 그럴 듯한 시설의 요양원에 갈 수도 없겠고, 또 그런 데 가서 산다고 해서 행복하지도 않을 것이다. 드물기는 하겠으나 ‘할 수 없이’ 모시고 살다가 “더 이상은 힘드니 같이 가십시다.” 그런 경우도 있더라고.

 

이제 와서 “옛날 같이 살고지라” 그러면, 온순한 사람에게 걸려야 “말이 될 소리를 해라”로 끝날 것이다. 그러니 어떡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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