暮煙起山村
길 가던 나그네가 고갯마루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을 바라보다가
하룻밤 묵을 집을 점찍고 내려간다.
대문이 큰집이라고 해서 후한 것도 아니니 딱 하나 짚기가 수월찮고
고약한 동네에서는 몇 집 두드려보다가 한데서 잘 셈치고 지나치기도 할 것이다.
주인과 객이 서로를 알아보고 좋은 인연으로 맺어짐을 기뻐하는 드문 경우도 있지.
{그러면 다시 보기 기다려지겠네.}
담 밖이나 바깥사랑에서 짐작하던 것과 안뜰에서 보는 건 대개 다르더라고.
흠모하다가 찾아가 만난 분에게서 기대하던 격도(格度)를 확인하지 못해 실망할 수도 있는데
‘탁월(卓越)’이란 들어갔다고 해서 나눌 수 없고 가까이에서 본다고 더 잘 보이지도 않거든.
좋은 사람과 어울렸다고 해서 범상(凡常) 너머 있는 것을 얻어내지는 못하더라고.
안방에 들였다고 해서 벽장 속에 갈무리한 것을 내줄 건 아니잖아?
그러니 친밀해지고 나서 오히려 얻지 못한 것의 존재유무를 의심하는 일이 생기더라니까.
뒤늦게 만난 게 억울해서 많이 나누며 그만큼 더 알면 좋겠는데
멀리서 위하여 빌던 마음조차 줄어드는 건
내가 아는 걸 이미 아는 이들이 있고 지금 즐기는 걸 다른 이들과도 재연(再演)하리라는 생각 때문.
나그네는 떠나 갈 길 갈 것이고 집이 있는 사람은 객을 들일 것인데
하루 저녁 좋은 교제도 괜찮았고
정녕 놓치기 아깝다면 소식 전하며 재회를 기다릴 것이다.
{‘눈 내리는 밤 친구 만나러가기(雪夜訪友)’ 같은 화제(畵題)가 많지만
나귀도 없는데 겨울나들이 쉽겠는가?
동안거 해제일 따로 있을까마는
그리움이 더욱 깊어질 때까지 참아보련다.}
그림은 위로부터
이상범의 ‘山家暮煙’, 조영석의 ‘雪中訪友圖’, 전기의 ‘梅花草屋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