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각인각색이라니 삼인삼색이겠구먼. 그냥 다르다는 게 아니고,
선생님 가라사대 세 사람이 갈 때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하셨네.
K형은 수 년 간 중동, 동남아 등 외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부인과 두 딸에게 편지를 썼고 지금까지 모아둔 게 수천 통이라고 한다.
한자로 쓸 만한 것은 다 한자로 써서 보냈기에 딸들이 또래에 비하여 한문 실력이 월등하다고.
사람 쫄게 만드는 것도 특기?
{나는 자식들에게 가계(家戒)랄까 ‘유배지에서 보내는 편지’ 같은 걸 남기지 못했네.
어머님 생전에 많이도 보내주셨던 수적(手迹)조차 보관하지 못하는 사람 우울해진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씩이야?
그래도 우표에 침 바르자면 피할 수 없었던 들척지근한 맛을 기억할 것이다.
진저리날 정도는 아니더라도 잠깐 가벼운 현기증을 불러오면서
‘전달’을 위해서 치러야 하는 희생쯤으로 여기던 비릿함을.
옛적 선비들은 간찰(簡札)이나 척독(尺牘)을 두 벌씩 써서
하나는 보내고 다른 하나는 간수하였다가 나중에 문집을 간행하는데 썼다.
평소에 수습하지 못한 경우에는 받은 이나 그의 자손에게서 보낸 것들을 되찾아 사용하기도 했다.
정신문화의 유지와 발전은 베껴 씀과 지움으로 가능했다.
제 능력 발휘할 틈 없이 복사에 전력했던 수도자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문헌과 문화재들은 성상파괴자와 개발업자로부터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수를 교정하거나 쓸데없는 기억을 삭제하지 못한다면
사람의 두뇌와 사는 환경은 더 이상 쓸모없거나 독소나 내뿜는 쓰레기하치장이 되고 말 것이다.
전자우편과 SMS의 가벼움이 참을 수 없어질 때에
이미 뿌린 것들을 거둘 수 있을까?
잘 간수하지 못해 자멸하거나 탄로의 위험 앞에 전전긍긍해서가 아니라
백지에 새로 쓰기 위해서 피차 삭치기로 합의할 수 없을까?
숱한 허섭스레기와 언어폭력에 대하여 사과하고
깨끗이 비워만 주신다면 꽃과 열매로 채워드리겠다고 간청하고
그러면 세월 지나도 그대의 옥안(玉案)하에서 마른 꽃잎과 허브 향이 남으리라고 꼬드기면?
습작시대에 아무렇게나 흘렸던 것들 없애주면 더 값나가는 것들로 쳐주겠다고 해도
완전삭제를 확인하지 못하니까 안 되는 얘기겠지?
그러니 나돌아 다니는 것들 거두지 못하고서야
조선 선비들의 빼어난 문집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겠네.
생각해보니 그렇다.
가족과 나누는 얘기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는가?
애인에게 들려준 얘기보다 시시한 것이 있을까?
쓸모없는 꾸밈과 웃기지도 않는 과장까지 아름다운 게 사랑 아니던가?
속임이 아니라고 믿는 바람에 진실보다 더 진실하게 된 것이 사랑 아니던가?
검증 가능한 의도에 동의하는 것은 계약이고
알 수 없는 것들을 알지 못하기에 믿어버리는 것이 종교라면
변변찮은 액세서리 주렁주렁 달아도 보기만 좋고 당찮은 허풍이 귀엽기만 해서
‘고매(高邁) 사절(謝絶)’이라고 써 붙인 방 안에서 키득거리는 것이 사랑 아니던가?
거둘 것 없다.
문집은 없어도 되고
뿌린 것은 그냥 자랄 것이다.
시시해서 그만 두겠다면 그만 두는 것이지만
그러고서야 사는 게 무슨 재미이겠는가?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고정희, ‘겨울 사랑’)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으로 버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의미 없어도 좋기만 한 반복을 즐기고
시시한 얘기로 세월을 잊으면서
별다른 감격 없이도 늙어감을 받아들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꽃 진 자리 잎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잎 진 자리 새가 앉는다고 너에게 쓴다.”
(천양희, ‘너에게 쓴다’)
생각나면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road...
갈림길에서 다른 쪽으로 갔던 이에게도 편지를 보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