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들이 나서지 못하고
마음으로야 팔도강산 구석구석 발자국 찍지 않은 데가 없겠다.
직선거리로 치면 지구를 일곱 바퀴 반쯤 두른 만큼 되겠네.
언젠 안 그랬는가, 내 사는 날은 다 ‘마음뿐’으로 지나갈 것이다.
그래도 이 겨울에는 정처 없는 나그네길에 나설 수 있으리라 다짐했고
어느 날 그렇게 없어질 줄 알라고 아내에게 수차에 걸쳐 암시했다.
그러고 떠나지 못했다.
올겨울 유난히 춥다고 호들갑 떨더니만
입춘추위라는 말이 무색하게 추위는 없이 봄이 들어선 듯하다.
겨울 가기 전에 할 일 남겨둔 사람은 초조할 때다.
눈 펑펑 동백꽃 펑펑을 놓쳤으면
“반가운 매화는 어디에 피었는고”도 남았고
“이화우 흩날릴 제”도 오겠지만
놓친 것은 올 것으로 대치되지는 않으니까
그때 가면 그때는 없어진 것이다.
변두리 마방 아니라도 도심에서라고 눈 내리지 않을 건 아니지만
남도 어디쯤에서 박용래의 ‘저녁눈’ 같은 풍경에 진입하리라 기대했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내켜 재워주지 않을 암자에서
궂은 날씨 핑계 삼아 뻔뻔 철판으로 이불 한 자락 얻었는데
그 지독한 소리로 잠은 못 이루겠더라고.
바람이 소리를 만들었다고
그래서 바람소리?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바람은 뒤집어쓴다, 바람소리라고
바람은 공기의 이동이니까
무엇이라 하기는 그렇다
느낄 수 있는 것을 두고
없다 할 건 아니다
있고 느끼는 것을 두고
이름 붙이는 게 어때서?
아침에 솔숲 지나는 소리
저녁에 댓잎 부비는 소리
“발이 없냐 차가 없냐 가면 가는 거지” 그러면 할 말 없지만
사백 만에 이르는, 아니 조류까지 합하면 천만이 넘는 생령이 묻힌 땅을
제 정신으로 밟고 돌아다닐 수는 없을 것 같아.
공장에서 찍어내듯 대량생산으로 출하한 牛 상품도 있을 것이고
윤아무개가 손가락질했듯이 축산농가 쪽에 물을 허물도 있을 것이다.
진즉 서울로 내뺀 자식들보다 더 사랑스럽고 의지할 만한 소 가족도 있을 것이다.
‘워낭소리’ 보며 “험험~”거리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을 열창한대도
이제 뭐 소를 그렇게 생각해주지도 않고 경운기 생긴 다음에야 소는 일꾼도 아니니까.
그래도...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의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묵화(墨畵)’-
*‘한겨레신문’ 기사에서
“내가 해봐서 아는데”를 겪어봐서 아는데
기우제 드리던 나라님이 제 종아리를 치던 “내 탓이요”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어쩌겠는가 힘없는 백성은 하늘만 쳐다보는데
고려 고종 때 스님 혜심(慧諶) 선사가 남긴 글...
田蠶不熟已多年 논농사 누에농사 안 되는지 이미 여러 해 됐고
饑饉相仍疾疫連 기근과 유행병은 잇달아 일어나네
禍本無門人所召 재앙이란 본시 문이 없고 사람이 불러오는 것인데도
不知自作怨諸天 제가 저지른 줄 알지 못하고 하늘만 원망하누나
딴 나라 무리는 제쳐두고라도 이 나라 백성이라면 천도재(遷度齋)라도 드려야 할 걸.
축생의 영정을 놓고 빈다는 것이 좀 그렇긴 한데
그래서 고개 돌릴 사람들은 ‘구제역 종식 기원’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그런 의미라면 미스바 광장에 모여 범국민적 회개와 기원의 대집회를 가졌던 일을 기억하는
타 종교 신자들은 가만있어도 되는 건지?
‘동체대비(同體大悲)’는 모든 생명들이 서로 연결되어있는 하나의 몸이라는 자각이다.
하나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은 기능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존비(尊卑)의 차별은 없다.
한 몸이기에 사랑 이전에
{“A가 B를 사랑한다는 식의 주어/술어(동사 + 대상)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늘 아프고-사지백체 중 한군데만 아파도 온몸이 아프니까- 늘 슬프다.
이 백성에게는 분노만 있지 슬픔이 없는 것 같아.
제 사연을 서글퍼하며 곧잘 눈물 흘리지만 슬픔은 없는가봐.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문태준, ‘누가 울고 간다’}
과거완료(have + p.p.)는 ‘돌이킬 수 없음’을 나타내는 시제이다.
Regret? I have a few.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잡지 못한 책임을 전가하려고?
잡지 못했는데...
‘그때’ 그 사람 아니어도 ‘그 사람’은 돌아올 것이다.
이렇게 겨울은 가는가?
겨울 다시 오겠지만 이 겨울 같은 건 이제 없다.
벼르던 겨울나들이
못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