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
하루에 다 돌아야 하는 일정, 남도에서 한 밤은 잔다고 해도 아침 일찍 밥만 먹고 올라와야 하는 걸음에
나주에서 화순으로 갔다가 무안으로 가자면 반대방향을 중복해서 돌아가게 되는데
빼어난 엘리트 부처님이 아니라 민중, 풀뿌리, 못난이, 그저 그만한 우리 같은 임 뵙자고
운주사를 찾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도암면 대초리를 다 가지 못해 등광리로 갈라지는 길에 ‘이공 기도터’라는 작은 화살표가 붙어있다.
그렇지, 도암이면 성인 이세종님이 계시던 곳 아닌가, 이현필님의 고향이기도 하고!
혹 돌아가는 길에 들를 수 있으려나 하며 지나쳤다.
어쩌다가 운주사 불목하니와 말을 나누게 되었다.
자기는 크리스천이라는 것, 절에서도 알지만 상관없다 해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
이세종, 이현필 선생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에서 종치고 길 쓸며 섬긴다는 것,
교단 소속의 목사님이 찾아와서 목회하는데 썩 맘에 들지는 않는 듯...
갈수록 조리 없고 헤맸지만, 말 상대 생겼으니 기회에 많이 풀고 싶어 하는 눈치.
일행이 있어 다 들어주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그렇구나, 그렇게 어른의 흔적과 ‘남은 자들(remnants)’이 있었네!
고맙게도 동행이 “언제 다시 오겠어, 들렀다 가지.” 해서 찾아가는데
큰 차를 가지고 막다른 고샅으로 잘못 들어갔다가 빼지 못하는 바람에
동네 할머니들이 몰려나와 안쓰러워 혀를 차며 구경하시는 꼴불견 연출.
성자의 흔적이라 하기에는 좀...
작은 이층 양옥-아예 움막이든지 아니면 제대로 기도원 건물 들어서든지- 하나 횅댕그렁하니 서있다.
수천억을 들여 성전(?) 짓는 대형교회, 상수도원을 불법 점유, 건설한 호화스런 수양관을 비웃는 듯?
괜한 부아가 스멀스멀.
그때도 그랬다.
배우지 못하고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 전한 예수를 ‘예수교인’들은 ‘이단’이라 했다.
이제 와서 소수의 먹물-학자 급-이 ‘숨겨진 성인’이라고 추켜세우지만
세속의 모든 것을 누려야 하는 교권주의자들은 지금도 그의 생애를 가리고 싶을 것이다.
무소유? 그것이 어찌 법정 스님의 전매특허이겠으며
그 옛적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성인을 사모하는 이들이 이세종 큰 어른을 모른단 말인가?
‘종교개혁’으로 시작해서 ‘늘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를 자랑하는 이들이
한국에 전래하여 120년 만에 세계 종교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가장 부패한 이익집단이 되다니!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을 받고도 재물신(mammon)을 섬기고
저희들 기득이권 수호를 위해서는 정치권과 야합하거나 ‘표몰이’로 협박하면서
국민의 생존권 보장이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목소리내기에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며 잠잠...
개신교가 이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체제 유지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교와는 달리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들에게 ‘복음’이었고 구원의 빛이었다.
근본주의 훈련을 받은 선교사들의 경직된 해석이 불행한 결과의 씨앗을 뿌리기는 했지만
그들은 섬기고 희생했고 사랑을 몸으로 실천했으며
그들에게서 ‘빛’을 넘겨받은 조선인들 중에 더러는 독립운동, 교육사업, 사회개혁에 앞장서고
더러는 핫바지로 바꿔 입은 원산지예수로 ‘참삶’을 살며 ‘세상의 빛’이 되었다.
이세종(1880~1942)은 조실부모하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는데,
많이 일하며 쓰지 않고 돈도 돌리면서 재산을 그러모아 그 동네에서는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
마흔 살이나 되어 예수를 들어보고 더 알고 싶어 비로소 한글을 깨쳐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예수가 좋아 손들고 너울너울 춤추며 “억조창생 만민들아! 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외쳤다는데,
아뿔싸, 바지가 흘러내려 드러난 줄도 몰랐다는.
그는 삭개오의 기사(누가복음 19장)를 읽고는 깨달음을 얻어 자기에게 빚진 모든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주었다.
그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마을 안에는 그에게 빚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면에서 그의 덕행을 알고 송덕비를 세워주자 여러 번 눈물로 사정하여 그 비석을 없애고 말았다.
명예나 칭찬은 마귀의 대접으로 알고 똥처럼 피한 그는 칭찬받기를 바라는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쓸데없이 칭찬하는 자도 마귀요, 칭찬받는 자도 마귀이다.”
평소에는 쑥 범벅이나 콩잎사귀 죽 같은 거친 음식을 들고,
잔칫집에서도 좋은 음식을 들지 않고 싸준 것은 거지들에게 나눠주었다.
병중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병석에서 일어나기까지 금식했다고 한다.
추운 겨울에도 남의 집 처마 아래서 웅크리고 밤을 지새울 사람을 생각해서 이불을 가슴 위로 덮고 자지 않았으며,
걸인들에게 일일이 상을 차려줄 수가 없는 것이 미안해서 그도 늘 맨땅에 앉아 밥을 먹었다고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립보서 2장 5-8절)
어른인 그가 어느 마을을 지나가다가 어린 개구쟁이들에게 걸렸는데,
지나가지 못하게 막고 서서 그의 팔을 비틀고 괴롭히며 “문둥이, 비렁뱅이, 내 아들”이라고 놀려도 묵묵했다.
이렇게 스스로 반성했다나...
“사자의 입을 막으신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들의 입을 못 막아내서 내게 이런 애매한 말을 듣게 하실 것인가?
나를 문둥이라고 욕하는 것은 내 몸이 비록 문둥이가 아닐지라도 내 속에 문둥병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알려주심이 아니겠는가?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비렁뱅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내가 세상 사람에게는 비렁뱅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야 빌어먹으니 옳은 말이다.”
자기를 비우고 낮춤이란 그런 것이다.
비워야 울리지 않겠는가? 울림이 있어야 울지 않겠는가?
비우지 못한 이들, 아니 더 많이 가져 가득 채운 자들이 사랑을 말하니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가리”가 되고 만 것이다.
포기하고 비웠기에 충만한 이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고, 그런 이들의 삶이 보여주는 천국이고 복음이다.
그는 주어진 가난을 이겨내고 부자가 되었다가, 예수 믿고는 가난을 택했다.
주어진 가난은 천형이고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선택한 가난은 아름다움의 극치이며 지복의 평안이다.
그는 환난과 고난을 기뻐하였으며,
사는 것이 죽는 것이고 죽는 것이 도리어 사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진리를 굳게 믿었다.
그에게는 생활의 어려움, 가정의 고난, 육신의 질병, 정신적인 고통 등이 계속되었지만,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병들었다고 울지 말고 나았다고 기뻐하지 말고 후에 또 올 병을 생각하라.
부자라고 기뻐하지 말고 가난하다고 한탄 말라. 화가 복이다. 이 이치를 깊이 명심하며 살라.”
그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산천초목과 짐승과 벌레에 이르기까지 사랑으로 대하였다.
모든 생명 가진 것을 경외하고 넘치는 사랑으로 대하였다.
풀 한 포기 상케 하지 않으려하고 밟혀 꿈틀거리는 개미를 보고는 애통하여 울었다.
아름다운 산천과 자연, 짐승들을 바라보며 “만물들아!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세.” 노래하며 기뻐했다.
그는 두 번이나 가출하여 몇 년씩 다른 남자와 살다 들어온 아내를 받아주고 누이처럼 대접했단다.
한국교회의 부패상이 뉴스거리로는 새로울 것이 없어 웃음거리로 올라오고
허 참, 일주기를 맞기도 전에 길상사까지 평안치 않다고 하니...
{宗敎란 으뜸 되는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중생 구원의 도구와 통로이기도 하고.}
뭐 그런 씁쓸함에 얘기 길어졌는데,
궁금하여 더 알고 싶다면 검색창을 통해서 단편적인 자료나마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이세종님을 ‘이공’이라 하는 건 높여 李公이 아니라
예수 믿어 공치고 ‘없는’ 존재처럼 되어 자기를 李空이라 불러주기를 원해서 그리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