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강에서
“逝者如斯夫 不舍晝夜”라는 말씀은 탄식도 아니고 당부도 아니니까
‘自彊不息’이니 하는 교훈 끌어낼 것도 없고
그냥 “그래, 그렇구나!” 그러면 된다.
Herakleitos도 “panta rhei”-모든 것은 흐른다- 그러지 않았는가.
사라지는 뜬얼음(浮氷) 품고 흐르는 화천강으로 갔다.
꽃피기 전이니 水流花開로 맞아떨어지지는 않고
매화 보러 간다 한들 늙은이 눈에야 안개 속 뿌연 그림자로 다가오겠지만
{老年花似霧中看!}
檀園은 주제에 버젓이 畵題로 올려놓던 걸.
'舟上觀梅圖' (164cm x 76cm)
봄물에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놓았으니
물 아래 하늘이요 하늘 위가 물이로다
이 중에 늙은 눈에 뵈는 꽃은 안개 속인가 하노라
{침침해지는 건 조리개의 문제도 있겠지만
놓지 못한 사랑과 悔恨이 五里霧中을 이루어...}
자작나무치고는 잘 생겼다고 해서 다시 쳐다보았네만
따로 떨어져 혼자 서 있는 건 꼴이 다 그렇지.
못생기면 어때
무익한 사람 기대어 그늘 즐기게 해주면
무용한 나무 아니네.
없음을 생각하면 없는 것이 떠오르고
‘것’은 있음이니까
없음이란 없다.
좋은 데라면 찾아가게 되고
사람들 꾀면 가꾸게 되니까
無何有之鄕이란 그냥 그려보는 곳이다.
폭설주의보가 반가워 겨울 가기 전에 갇혀보려 했는데
밤새 지고 있던 무게가 날 새니 물에 빠진 나귀의 소금 짐처럼 사라졌다.
賞春客 들끓기 전에 어슬렁거렸으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