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일
선친 생전에는 일가친척 대접하느라 음력으로 생신을 치렀다.
해외에 흩어져 사는 자손들이 기억하기 좋으라고 양력으로 꼽으니 오늘.
따로 뭘 할 것도 아니고 동기간에 이메일이나 오갔다.
독거노인들 많고 대부분은 고독지옥에서 사는 게 현실이니까
가친께서 더 외롭고 힘든 형편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1년 8개월을 모시고 있었다고 내세우기가 부끄러운 자식으로서 회한이 많다.
그런 목적으로 일 그만두고 가족을 떠나 귀국하였다면
따뜻하게 감싸고 지성으로 보살펴드려야 했는데
별로...
입주 도우미가 있으니 몸의 필요를 챙겨드릴 것도 없고
잠시 주물러드리다 보면 “그만 가봐” 그러셨다.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서였을까 어색했고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과제를 하나 주셨다.
뒤늦게 시작한 시작(詩作), 다듬고 싶으셨는지 맞춤법을 봐달라고 그러셨다.
남기고 싶으셨던 건데
“아니, 그런 걸 왜...” 그랬다.
1953년 환도하여 굴레방다리에 자리를 잡았던 때에
아버님과 둘이서만 아현 시장에서 꿀꿀이죽과 양 대추(dart) 통조림을 사먹었던 일,
기껏 호떡을 사주시며 “양껏 먹어라, 아버지 돈 많아” 그러시기에
“돈 많아서 호떡?” 하는 기분으로 치켜봤던 일,
연보라색을 좋아하시는 분이 시골길을 걷다가 “이게 들국화라는 꽃이다” 그러셔서
속으로 “아 쪽팔려 누가 들국화를 모를까봐서...” 그랬던 일,
{그때는 쑥부쟁이, 개미취, 구절초... 그런 이름들 없었거든.}
어른의 호의를 왜곡했던 소년의 치기, 어쩌다가 종아리 맞았던 기억들인데...
가신지 네 해 되고서 즐거웠던 일, 행복한 추억이 더 많이 떠오른다.
어머니 먼저 가시고 2l년을 홀로 사셨다.
모든 것을 아내에게 맡겼던 분께서 어떻게 견디셨을까?
이런 쪽글도 남기셨다. 시?
‘내가 없어봐’
어느 부부의 주고받은 말이다
-내가 없어봐 당신 꼴이 무엇이 되나
-당신 말이 맞아 당신 없으면 나도 없는 거지
-하기야 당신이 있기에 나도 있는 거지 우리 같이 잘 삽시다.
-그래요 우리 같이 이렇게 손잡고 우리 사랑 보여 줘요
또
‘맞춤옷’
나는 지난 수년 내 몇 번이나
구급차에 실려 그 비명 같은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응급실로 가곤 하였다.
이렇게 나는 오락가락
‘죽음의 연습’을 반복하였다.
삶의 한계점!
나는 그 즐겨 읽던 책도
일상의 옷가지도
필요한 이에게 내주었다.
‘쓸데가 없어서’이었다.
나에게는
이십년이 지난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는 ‘맞춤옷’
한 벌이 있다.
혹 좀이라도 쏠세라
해마다 한 두 차례 햇빛 쏘여주면서.
반드시 쓸데가 있기 때문이다.
이 옷 만드느라
아픈 몸 일으켜
거들던 아내의 손놀림
그 옷자락에 혹 지문이라도...
이렇게 씩 웃으면
어느새 나타난 그도 미소 짓는다.
나는“쓸데없다” 하였는데
하나님은 “너도 쓸데 있다” 하신다.
‘새 맞춤옷’을 보여주시면서.
“나도 쓸데가 있다.” 아멘.
또
‘일어나 함께’
꺼져가는 노을 속 한 시점에서
기억 속의 벗님네들
소식 전할 이들 살피어 보니
몇몇 그 이름 지워지고 없네
천국 행차하시었어라
불원간 글 보내는 이 이름도
이렇게 지워지고 안 보이리라
아무도 찾아올 이 없는 사람
누구도 찾아갈 이 없는 사람
누구에게도 말 걸 수 없는 사람
대꾸해줄 이 없는 사람
이 사람은 홀로만의 섬사람이라
아, 사람이 그리워라
아, 말이 그리워라
아, 정이 그리워라
누구라 말 좀 받아주소
누구라 말 좀 건네주소
누구라 정 좀 전해주소
짝이 없는 사람
이웃이 없는 사람
무거운 침묵만이 찬바람을 일으키네
여봐요, 거기 아무도 없소?
아, 사람, 사람이 그리워라
나의 기다리고 바라던 이
나의 외로움 받아주는 님
한밤중 느닷없이 찾아주셨네
눈물 씻어주며 말씀하시네
네 어찌 여기서 울고 있느냐
내 너와 함께 하거늘
너 왜 홀로이라 하는가
앞으로도 너와 함께 하리라
네 손 잡아주리니 손을 내밀어라
슬픔 추스르고 기뻐하여라
친구여, 일어나 함께 가자
님의 손 꼭 붙들고 감사로 화답하며
또?
좀 돼.
몇 해 더 가면 탄생 백주년, 외인이 챙겨 기념할 만한 ‘위인’은 아니셨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