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에서 1 - 아름다운 공공건축물
무주구천동이라면 오지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힐 만한 곳이었다.
대진고속도로가 뚫리고는 세 시간이면 서울에 닿을 수 있게 되었고 무주리조트와 케이블카 등으로
사철 덕유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무주는 더 이상 외지고 험한 산골이 아니다.
“아하 蜀道之難이 예로구나”라는 노래 부를 수 없겠네.
그래서 잘 살게 되었는지?
그 무슨 터널효과라던가, 지방 중소도시 상권은 수액이 말라버린 고사목이 되고 말았다.
시골에는 자식들에게 무공해먹을거리 대며 물려줄 땅 지키고 있는 늙은이들이나 남고 젊은이들은 다 증발해버렸다.
뭘 모르는 선출직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치적과시용 이익창출 사업을 벌이고는 빚만 안기는 악순환...
에고 말을 말아야지.
고창 갔다가 광주 들려 돌아오는 길에 ‘감응의 건축’으로 알게 된 고 정기용 선생이 떠올라서 무주를 찾게 되었다.
꽃피는 춘삼월 호시절에 들려서이기도 하겠지만
무싯날에 장터에 간 것처럼 쓸쓸하지 않고 생기가 도네?
재넘이로 으슬으슬해서 커피 한 잔 한다고 리조트에 들렀으나
건물-여가 워디여,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부터 해서 바글거리는 젊은이들 차림새, 먹을거리 등
“아하, 저걸 ‘세계화’라고 하는가?”라는 섭섭함에 금방 떠나고 말았다.
적상산, 구천동 계곡 갔다가 무슨 시간이 남아 돌아보겠냐만 발서슴하여 몇 군데 찾아봤다.
반디랜드-반딧불이 생태공원- 안에 있는 곤충박물관.
곤충은 식물이 없으면 살 수 없으니까-최재천 주제- 옆에 작지만 식물원이 붙어있다.
{하긴 어떤 種이 떨어져서 저희들끼리만 살 수 있겠는가?}
머리, 가슴, 배 혹은 머리, 몸통, 꼬리의 3분절을 특징으로 하는 곤충의 구조에 따라
分節과 結合이 맞물린 건물을 ‘만들려고 했다’는 얘기.
만들려고 했다?
어느 건축물은 안 그렇겠느냐마는 “돈은 얼마 들어도 좋으니까...”라는 백지위임도 아니고
공공건물의 경우에는 제한된 예산과 관계 공무원들의 간섭, 선출직 단체장의 무지와 고집
회원-주민, 이용자, 등-들의 압력과 이해 충돌 등의 변수 등이 있어
건축가는 설계도 원안대로 진행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예산확보의 문제와 아 그, 변덕... 또 있지, 각종 시민단체의 반대들.
인증샷 하나 건지고 서둘러 철수하지 않고
도무지 바쁠 이유가 없어 나릿나릿 여유부린 곳이 공설납골당이었다.
납골당은 산 자가 죽은 자를 만나러 가는 곳인데
사실 죽은 자야 뭘 느끼겠어, 거긴 산 자를 위한 공간이다.
산 자들이 가서 회상하고 자책하고 한번 방문으로 미안함이 가신 표정을 지으며 나오는 곳이다.
죽음과 굉장히 먼 데 있는 것처럼 joie de vivre를 확인하는 곳.
건축가 승효상은 김영섭, 유홍준과 더불어 정기용의 유해를 모시고 벽제화장장과 납골묘를 찾았다가
그 괴기한 현장 분위기와 저질스러운 통과의례에 고인에 대한 죄송함과 절망감으로 치를 떨었다는데
연고지도 아니고 멀기도 했겠지만... 그가 지은 무주 추모의 집에서 쉴 수는 없었을까?
도무지 어둠이 없는 데 같이 빛이 가득 들어오는 곳
세시봉 친구들이 아카펠라로 불렀던 ‘Way beyond the blue’!
고개를 치켜들지 않아도 산들이 보이고 조금 숙이면 살던 동네와 논밭이 보이고
마침 좋은 철이라 그렇겠네만 꽃을 가득 단 나무가 들어오겠다며 웃고 있는 방.
상한 마음이 치유 받고 사랑을 고백하기에도 괜찮은 곳-청혼 성공률이 높을 것 같네.
종합복지관, 노인전문요양원, 보건의료원, 농민의 집, 군청을 둘러보았다.
복지관은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콘텐츠도 훌륭하고 잘 관리되고 있다.
나는 여유 없어 해보지 못했던 것들 즐기는 노인들의 얼굴에 그늘이 없다.
{포켓볼, 탁구, 체력단련, 장기바둑 하고 사군자 치는 분들 양해 받고 찍은 사진 올리지 않는다.}
노인요양원의 설계 원칙은 ‘따로 또 같이 내 집 같은 공간’이라 했다.
복도를 따라 좌우 칸칸 병실에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타운하우스가 中庭으로 연결된 듯한.
‘굉장한’ 축조물이라고 해서 사람을 압도해서는 안 되네.
아무리 웅대해도 사람을 작고 초라하게 만들면 안 되네.
어쩌다 감당 못할 비싼 레스토랑에 들어갔다가 마음 졸이고 대접 받지 못하고 나와서 휴~할 게 아니고
굳이 ‘자연’을 차단하고 공간을 제한하여 건물을 만드는 것은
때로는 자연의 무차별적 과도함으로부터 보호하고, 품어주며 북돋아주는 곳이 필요해서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자연에서 격리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 바람, 빗물까지 들이치게 하는-관리에 품이 들어가기는 하겠으나- 게 좋은 쉼터이겠다.
Mies van der Rohe가 처음 한 말은 아니지만 “God is in the details.”라는데
우릿함은 그럴 듯한 전체가 아니라 사소한 부분에 깃든 배려로부터 온다.
공공시설의 아름다움은 눈에 띄지 않는 구석의 편의에 있다.
쉬고 나면 또 가는데, 뛰지 않으면 그리 힘들 것도 없다.
산수화에서 보듯 고개 넘어가는 나무꾼, 화폭의 구석에 놓인 조각배에서 조는 어부는
자연에 녹아들고 작지만 자연의 완성미를 구성하는 당당한 일부이니만큼 꿀릴 게 없겠다.
등나무 넝쿨로 관중석 지붕을 삼은 공설운동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빛깔의 꽃이 폈을 때 찾아보기로.
다시 방문할 때는 관심 있는 이들과 함께 가서 관계자의 안내를 받으면 좋겠다.
{아래 사진은 검색창에서 찾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