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의 힘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도!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도!
그런데, 그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있다 치고... {그러니까, “가상으로”를 붙이고 이어지는 얘기}
그늘 없는 인생은 천박한 것일까?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그랬듯이 “그늘 없어 죄송합니다” 그래야 하는 건지?
경연(競演)이란 잘하는 이와 못 하는 이를 가려 뽑는 것이라서
다들 잘했다고 해도 탈락자가 있기 마련인데
“예술에 점수를 매기는 건 씻을 수 없는 죄악”이라고 이옹이 한 말씀 했지만
정해진 규칙을 알고 인정하며 뛰어든 ‘경쟁자’들은 청중평가단의 ‘평가’에 따를 수밖에 없겠구나.
어쩌겠는가, 가수를 가리는데 ‘가창력’을 표준으로 하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도 없네.
그런데 그렇게 밀려 나가야 하는 이가 왜 김연우인가?
그야 뭐 다른 이들도 다 잘했으니까 누가 걸렸더라도 마찬가지 안타까움이 일었으리라.
문제는 이것. 김연우가 노래를 마치고 한 얘기.
“나의 노래 인생은 평탄한 삶의 연속이었다... 굴곡 없이 산 인생에서 깊이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것 같다.”
그게 바로 “그늘이 없어서 죄송합니다.”라는 얘기 아닌가?
아냐, 왜? 평탄했으면 좋지, 미안해할 것 없어.
잘난 부모를 두어 나면서부터 IQ 종결자, 끝내주는 환경에서 영재교육을 받고
‘최연소~’와 ‘최우수~’로 시작하는 모든 타이틀을 석권한 천재를 보면서
사람들은 ‘감탄’할 것이다.
그 감탄의 시선에는 시샘도 섞일 수 있겠다.
그런데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지닌 소년이 일정 교과과정을 마친 후에
그저 그런 자격증이라도 하나 따거나 어떤 형태의 성취를 얻게 된 것을 두고 사람들은 ‘감동’한다.
그 감동에 목말라서일까? 사람들이 곧잘 울더라고.
에이, 쪽팔리게 나까지... 밖에서라면 “아마도 빗물이겠지”라고 했겠는데
아 글쎄 임재범이 되지도 않는 목소리로 꽥꽥거리는 걸 보고 들으며 웬일로 습막이 번지는지...
알고 보니 고난의 콤비 세트를 제대로 갖춘 굴곡진 인생이었는데
그렇게 쌓은 내공이 어마어마한 포스가 되어 뿜어 나오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그냥 쫄았던 거지.
정도와 분량의 차이는 있지만 저들도 “내 겪은 고난 누가 알랴”라고 탄식할 이들이면서 말이지.
고난을 통한 연단? 그게 좀 식상한 메뉴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서라도 한다지만
피할 수 없으니 겪고 닥치면 당하는 거라도 일부러 초대할 건 없네.
평탄하면 복된 인생이지 뭐.
그렇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몰아닥쳤을 때에 그냥 당하지만 말고 이용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햇볕이 쪼이니 식물이 자라는 거지만, 햇볕만 있으면 다 타죽고 말게? 옥토도 사막이 되고 말겠고.
그늘은 있어야 돼.
쉬기도 하고 내공도 추스르게 하는 그늘.
(정기용 설계, 무주의 군내버스 정거장)
그래, 평탄한 게 좋은 거야.
{복을 타고났다고 처지가 다른 사람들을 능력 부족, 노력 부족으로 깔보는 심보가 내장되지 않는다면 말이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험한 길, 좁은 길을 제가 만든 것도 아니고 가야하니까 놓인 길로 갈 수밖에.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막연한 기다림에는 찾아올 게 없어도
‘어둠의 세월’을 자산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자나 깨나 불어나는 이자로 쌓아가는 게 제법 되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