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1 -해초-

 

점심에 약속 있다 하니 그 후 들러 놀다가 저녁 일찍 들자고 그랬다.

은퇴 전 그의 연구실로 찾아가는 마지막 걸음인가싶다.

“왔어? 그럼 가지.”

아니, 이 비 오는 데 어딜?

“계곡은 장마철이 진짜야. 숲 냄새도 비올 때가 제일 좋아.”

축축한 걸 좋아하네?

{젖을 때는 젖어야하지만 노상 즈분한 건 좀 그렇지. 눈물도 이슬 반짝하듯이면 모를까...}

작년에도 한번 속았다가 X고생한 적이 있지만, 그런 줄 알고 따라가는 건 속아주는 것,

아니다, 저도 끌리면서 ‘당했다’는 둘러댐을 준비하는 셈이다.

우산 받쳐 들고 운동화 신고 근근이 따라가는 사람에게 흘리는 타박

“신발 괜찮은 것 같은데 잘 못 걷는구나.”

이런, 일찍이 아내에게 저지른 만행의 기억이 후회의 물결로 닥친다. {그 기분 알겠다.}

“미끄러지기 쉬우니 조심해.”

누가 몰라서? 조심해야 하면 위험한 거고, 그러면 안 했어야지.

부인이 사줬다는 비옷-단돈 000원에 모신다는 지하철 판매 상품- 품질을 연방 칭찬하며

앞서 간 그가 보이지 않을 때에 나는 한번 미끄러지고 한번 발목을 삐끗했다.

이러고서야 더 못가지.

“할 수 없지 뭐, 그만 내려가자.” {아쉽다는 표정의 상판에 대고 “으그,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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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자마자 척척한 옷가지 벗어던지고는 그냥 곯아떨어졌다.

 

바다 속.

{신혼여행 다녀온 딸이 스노클링 얘기를 해서일 것이다.}

 

나 해초야.

그러니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게 만들 이도 당연히 해초겠네.

{개별차가 있다 하더라도 우선은 같은 類이어야지, 科, 屬까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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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정일근 시인의 ‘매생이’를 끌어오면 설명이 줄어들겠구나.

 

다시 장가든다면 목포와 해남 사이쯤

매생이국 끓일 줄 아는 어머니를 둔

매생이처럼 달고 향기로운 여자와 살고 싶다.

뻘바다에서 매생이 따는 한겨울이 오면

장모의 백년손님으로 당당하게 찾아가

아침저녁 밥상에 오르는 매생이국을 먹으며

눈 나리는 겨울밤 뜨끈뜨끈하게 보내고 싶다.

파래 위에 김 잡히고 김 위에 매생이 잡히니

매생이를 먹고 자란 나의 아내는

명주실처럼 부드러운 여자일거니, 우리는

명주실이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해로할 것이다.

남쪽에서 매생이국을 먹어본 사람은 안다

차가운 표정 속에 감추어진 뜨거운 진실과

그 진실 훌훌 소리 내어 마시다 보면

영혼과 육체가 함께 뜨거워지는 것을.

아, 나의 아내도 그러할 것이다

뜨거워지면 엉켜 떨어지지 않는 매생이처럼

우리는 한 몸이 되어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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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보자... 착착 감기고, 잘 풀어지고, 부드럽고, 당근 바다냄새 나는.

아는 이는 알지만, 김 안 나도 뜨겁다고.

{왜, 山사람은 매생이국에 섬사람은 토란국에 덴다잖아? 뭘 모르다간 봉변당하지.}

 

“매생이~~~ 매생이 어딨니~~~” {두리번두리번}

{얼마나 흘렀을까,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내가 그다만...”

{자태가 드러나고 눈을 맞춘다} “당신이었구려.”

 

‘얼마나’가 얼마면 되겠나?

옷깃을 스치며 지나는 인연을 만나는데 오백 년이 걸린다대.

얼굴을 마주하고 앉는 인연에 이르려면 삼천 년이 지나야 한다네.

그러니 ‘딱 그대 아니면 안 될’ 존재와의 docking에는 백만 년쯤?

 

사람의 공덕으로 얻을 게 아니니 하늘 뜻의 선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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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리진 않아도 얘기 나온 김에 안도현 시인의 ‘매생이국’도.

 

저 남도의 해안에서 왔다는

맑은 국물도 아니고 건더기도 아닌 푸른 것,

다만 푸르기만 한 것

바다의 자궁이 오글오글 새끼들을 낳을 때

터뜨린 양수라고 해야 하나?

숙취의 입술에 닿은 이 끈적이는 서러움의

정체를 바다의 키스라고 해야 하나?

뜨거운 눈물이라고 해야 하나?

입에서 오장육부까지 이어지는 푸른 물줄기의 폭포여

아무리 생각해도, 아 나는 사랑의 수심을 몰랐어라.

 

{행 나누기는 자신 없네, 인터넷 바다에서 떠다니는 것들은 그게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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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이랬다.

 

대구 피난 시절, 반찬이라고 뭐 별 게 있었으랴

어쩌다 싱기가 밥상에 오를 때면 생존경쟁에 초연한 척하던 아이의 눈도 반짝였다.

씻지 않아 모래가 으적으적 씹히고 식초와 간장도 안 친 듯

그래서 바다냄새를 떨치지 못한 싱기를 입 속에 오래 두고 우물거렸다.

 

그 후 옛 맛을 찾아보려고 경상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싱기’가 뭔지를 알지 못하더라고.

나중에 납작파래를 ‘싱경이’라고 하는데, 경남 일부지역에서는 ‘싱기’라고 그런다는.

맛? “바로 이거야”까지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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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싱기 찾아다니다가 감태, 톳, 꼬시래기, 곰피, 모자반-제주도에선 ‘몸’- 등도 알게 되었다.

{섞어 버무리고 무치면 그게 그거지만...}

해남, 장흥, 고흥쯤에서, 아니라도 남도 바다마을 아무데라면 어때

해초반찬 끊이지 않는 밥상 받으며 몇 년쯤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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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다 기억나지도 않고 깨어 얘기하는 동안 믿고 싶은 부분들은 부풀려 꾸며질 것이고

그대로 밝히기에는 좀 그렇고 그런 것들이 있잖아?

하니까 다할 건 아닌데...

 

흐느적거리는 해초로 다가와 슬쩍슬쩍 건드리는 무희의 옷자락처럼 놀리다가

아주 감싸다가, 그래서 피부처럼 덮다가, 스며들어와 미토콘드리아처럼 뭘 떠맡은 그대.

“나는 난데 내 안에 들어온 넌 뭐야?” 그러다가

내 안에 들어온 것, 나와 섞인 건 난데, 내가 나를 나 아니라고 하며 내칠 수는 없지!

그러다보니 꿈이었구나.

초저녁에 좀 참을 걸, 몰려오는 졸음에 굴복하고 꿈길에 끌려가다가 깨고 보니

한밤이구나.

씻고 정식으로 잠자리에 들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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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냄새, 비린내, 그래도 역하지 않은 냄새

비를 핥으면 해초 냄새가 나는

그런 비라면 오래 와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