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언제나 특별한 예사로움-

 

   제목을 별나게 붙였지만, 거기에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여느’란 예사로운, 별다를 게 없는, 보통, 뭐 그런 뜻. 그런 뜻이니까 그렇게 새겨들으라는 것도 아니고, 예술가들이 그의 작품에 무슨 제목을 붙이기도 그렇고 해서 ‘작품 A’ ‘Objet Un’이라고 그냥 표기하는 식으로 알아주면 되겠네.

 

   장공(長空) 김재준 목사님을 아시는가? 교계의 큰 별 같은 분이셨는데, 고 한경직 목사님의 당대로 그만큼 존경받으실 만한데 그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 사후에 그의 저작이 고급 장정으로 제본되어 장공전집으로 나온 줄은 알지만, 구하지는 못했네. 그 어른이 캐나다에서 망명생활처럼 머무실 때에도 부지런히 쓰는 작업을 계속하셨고, 동네 한인 인쇄소에서 조잡한 제본으로 책이 몇 권 나왔는데, 그게 ‘범용기(凡庸記)’라는 연작이었네.

   ‘범용’이 뭐겠어? “그렇고 그런, 평범하고 용렬한, 뛰어날 게 없는”이라는 뜻. 책의 내용을 보면 정말 그래. 뭐 신통한 게 없고, 그냥 신변잡기를 용케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적어 놓으신 거야. ‘야화원 여록’(野花園 餘錄)이라는 칸을 따로 만들어서 그날그날 일어난 일들을 다 챙겨두셨더군. 야화원은 ‘들꽃 마당’이란 뜻이고 ‘여록’은 ‘가외로 붙인 글’이란 뜻이니까, 모아는 두었지만 들여다보지 않아도 될 것, 시간 없으면 굳이 듣지 않아도 될 얘기로 받으면 되겠는데, 그럴 거라면 뭣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야 했을까? “아니, 대학자이신데 무슨 학문적 업적을 정리하시던가, 또, 민주 투사이신데 역사에 남을만한 무슨 선언서 같은 걸 쓰시던가, 또, 목사이신데 설교집 같은 거나 내시지, 어느 노인 칠순 잔치에 간 얘기, 손자에게 피자 사준 얘기, 감기 들어 불편하다는 얘기... 그런 걸 활자화한담?” 그런 마음이 들었거든.

   그러면, 그분 자신의 입으로 하는 범용한 기록이나마 써낸 데에 대한 그분의 ‘이유’를 들어보자고. “첫째는, 생각보다도 삶 자체를 써 보는 것이다. ‘위인’이 아니라도 ‘삶’은 그 어느 인간에게나 있었고 또 그 삶은 그의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특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게 눈을 주셔서 저 푸른 하늘, 흰 구름, 해와 달, 별과 모래, 산과 들, 바다와 강- 이 ‘에덴의 동산’을 보게 하시고 그 안에서 보고라도 하고 싶어진 것이라 하겠다. 둘째로는 이 ‘몸’이 시간의 물결에 긁히고 갈퀴고 ‘기억’의 ‘정기’가 추운 날 체온처럼 창틈으로 새어 빠지기 전에 종이쪼가리에라도 붙잡아두고 싶은 욕심에서다... ‘개가 바위에 갔다온 것 같다’는 속담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것 때문이겠다.”

   인용이 길어졌구먼. 그분이 위인인 것은 위대한 점이 많아서가 아니고, 평범한 것들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생각, 뒤늦은 깨우침이네.

   내친 김에 장공 얘기를 좀 더 하겠네. 한국에서 군부독재정권이 물러나자 그분이 한국으로 들어오셨는데, 노약하셔서 특별히 하실 일도 없고 그랬겠지. 일과라고는 한자 성경을 써내려 가시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 사무엘하 16장 14절까지 써놓고 돌아가셨다고. 그 마지막 구절이 뭐였기에? “왕과 그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곤비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큰 분을 옆에서 모시면서 가르침도 받고 그랬어야 하는데, 한 도시에서 몇 년 같이 지냈지만, 그 때 내 눈이 뼜지, 그렇게 ‘큰 분’인지 몰랐어. 아까 언급한 그 ‘범용기’, 그 초서 명필 원고를 읽기도 어려운데다 내용도 그렇고 해서 교정을 보라고 부탁하셨는데, 해드리지 못했거든. 그래도 책 나왔다고 내게 주실 때에 몇 자 적으셨더라. “000 00 河淸燈晴”이라고. 강처럼 맑고 등처럼 개이라는 말씀이겠네. ‘百年河淸’이라는 말 때문에 뜨끔했지. 강이라고 다 맑을 것도 아니고, 일단 그렇게 흐리고 탁하고 보면 어느 세월에 깨끗해지겠냐고? 그리고, 등불이 밝으려면 심지가 깨끗해야 하는데, 어, 그것도 자신 없거든.

 

   그러셨잖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라고. ‘꺼져 가는’이라고 옮겼지만, 원문에 보다 충실하자면 ‘끄름만 내는’이라고 해야 되겠다. 타다 남은 초꼬지 심지 말이지, 불꽃만 내면 좋겠는데 연기까지 내니 밝지가 않아. 불꽃이 ‘은혜’라면 연기는 ‘본성’이라 하겠네. 은혜보다 본성이 강하다면, 그것은 끄름만 내는 심지 같은 것인데, 주님께서 그런 심지를 비벼 끄지 않으시는 것처럼 본성에 따라 사는 부패한 삶을 거기에 같이 있는 미미한 불같은 은혜로 인하여 꺼지지 않도록 내버려두신 것이라!

   내가 오늘날까지 그렇게 살아왔다고 고백하기가 어려워서 이만큼 얘기가 돌고 돌아 길어진 모양이구나. 그래, 내 평생 살아온 길 뒤를 돌아보니 불꽃과 함께 끄름도 있었구나. {뭐, 당신도 그렇겠지.}

 

   그 ‘凡庸’이라는 말, 제가 쓰면 겸손하다 그러겠지만, 남이 저를 가리켜 그리 말하면 기분 좋지 않겠네. ‘凡’은 크게 쳐주어 보통, 실제로는 변변치 못함을 가리키는 말이고, ‘庸’도 그저 그런 뜻. 헌데, ‘凡’은 ‘전부’{헬라어로 pantos, 영어로 pan-}, ‘庸’은 ‘크다’, ‘일정하여 변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네. ‘庸劣’이라는 김새는 말도 있는가 하면, 일부 지식인이 최고의 이상으로 꼽는 ‘中庸’이라는 말로 이어지기도 하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도 있었지. ‘凡事’는 ‘모든 일’이기도 하고, ‘별나지 않은 것’이기도 하겠네. 별나지 않은 것, 예사로운 것,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을 두고도 감사하니까, 오, 그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더라고.   아니, 그건 처음부터 특별한 것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