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 불감증

 

한밤에 해괴한 기사 올라왔지만 분노하지 않기로. 허탈할 이유도 없다. 그냥 “몰랐어?”로 지나간다. 그러다가 그런 소식을 접하고도 평정(?)을 잃지 않는 증세를 ‘불감증’이라고 하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그 정서적 불감증이라는 게 어떤 경우에는 인격의 성숙도를 나타내는 표징으로 은근히 권장되기도 한다 말이지. 고 케네디 대통령의 어머니가 그랬다던가, “성인은 눈물을 흘린다든지 그런 과도한 표정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도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린다?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데 그렇게 억지로라도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느끼지 못한다? 냉정하다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불감, 무감각, 그러면 ‘인간’이라 할 수 없겠네. 짐승이라고 통각(痛覺)이 없는 것도 아닌데.

 

금욕주의! 그러면 꽤 괜찮은 삶의 원칙이거나 태도 같지만, 그건 뭐 ‘사상’도 아니네. 금욕주의자들은 역경과 고통-어떤 이들은 “고통이란 없다”고 극단적으로 선언하기도 했지만-을 보다 잘 견디기 위해서 불감증을 택했다. 통감(痛感)이 있는데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이의 진실성을 의심할 것은 아니고, 선택한 ‘정서적’ 불감증은 훈련에 의하여 강화되니까 아픈데도 아프지 않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지.

 

저도 아프지 않다는데 어떻게 남들의 아픔을 더불어 느낄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서는 긍휼이나 연민(com-passion, mit-leid)을 기대할 수 없겠네? 제대로 된(?) 금욕주의자들 중에는 제게 닥친 것들은 아픔으로 여기지도 않으면서 이웃-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피조물’에게로까지-의 아픔을 제 아픔으로 여기며 한없이 슬퍼한 이들도 있다. 가장 악질적인 경우는 제가 겪는 신체적 아픔, 손실, 피해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엄살을 넘어 원통해하며 광분하여 발작하는 반면에 다른 이들이 겪는 불행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그들의 슬픔을 조롱하는 자들이라 하겠다.

 

예전에야 ‘공황장애’ 같은 게 있었던가? 자살로 생을 포기하는 이들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다소간에 사소한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모르지 뭐, 남이야.} 군대에서 하극상, 총기난사, 혹은 자살 등으로 귀결되는 과정의 시초도 “그까짓 걸 못 참고...” 싶은 것들도 있다. 나는 군대생활을 하도 편하게 해서 정말 부끄럽다. 그런 중에도 겁 없이 기어올랐다가 맞아 죽을 뻔한 적도 몇 번 있다. 곡괭이 자루로 맷수를 세어가며 쉰한 대를 맞은 적도 있다. 뙤약볕 아래서 M1 가늠자를 이로 물고 10분을 서 있으라는 기합을 받은 적도 있다. {10분까지 갔는지는 모르겠고 주기도문을 수없이 반복하다가 쓰러졌다.} 한 대라도 잘못 맞아 병X이 될 수도 있는데 잘 때리는 사람한테 맞아서 그랬는지 괜찮았고, 앞니로 트럭을 끌 정도는 아니지만 오징어다리 끊는 데는 문제없다. 그렇다고 “난 이런저런 거 다 겪었는데, 요즘 애들은 작은 어려움도 견딜 줄 모른단 말이야, 도무지 어떻게 자라서 그런지...” 그럴 건 없다. 세상이 달라졌으니.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시위, 농성 등의 집단적 표현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는 줄 안다. “단순 교통사고와 다를 게 뭐냐, 나라 위해서 대단한 공헌이라도 했나, 무슨 벼슬하는 줄 알고...”로 나오는 이들도 있다. 더러 좀 과하다 싶을 수도 있겠다, 당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과거의 비슷한 사례와 비교하여 보상의 형평성을 따지는 이들도 있다. 여객기 추락, 차량충돌, 폭발사고, 그런 것처럼 순식간에 손써볼 틈도 없이 가버린 것이 아니라, 구조할 수 있었는데! 내 아들, 딸, 남편... 살아날 수 있었는데! 그런 것이 너무 억울하고, 아무도 책임지는 이는 없고 눈물 한 줄기 흘리고는 했던 말도 지키지 않는 현실에 분노하는 것이다. 정치적 성향이 어떻든지, 편향성을 두고 네 편 내 편 가를 것이 아니라, 아픔을 아픔으로 여기고, 같이 나눠 극복하자는 어진 마음들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