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하기(樹下期)
이룬 것도 없는 사람이 쉬고 싶다고 그러면 “뭘 했다고?”라는 소리 듣기 십상이지만
그냥 서있기만 했던 바위도 풍화를 견디지 못하는데
살아 움직인 사람에게 고단함이 없겠는가?
돌아오자마자 지방에 내려갈 일이 생겼는데 끝내지 못하고 올라왔다.
시차 적응 난조가 몸살처럼 온데다가 견비통이 겹쳐 빌빌대는 중.
몸이 불편하면 생각이 ‘과격’ 쪽으로 치닫기 쉬워
“내 쉴 곳 어디?”에 이르렀는데
“나무 밑이지 뭐.” 그러고는 피식 웃었다.
최근에 숲길을 걸을 기회가 더러 있었다.
캐나다단풍, 노르웨이단풍, 슈가검 등 활엽수 숲
돌아와서는 갈참나무, 굴참나무와 소나무, 삼나무가 번갈아 나타나는 숲, 대숲을.
좀 많이 걸었다 싶을 때에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면 그게 ‘쉼(休)’이다.
{그 아침에 베드로는 “제가(人) 말씀(言)에 의지하여”라고 했으니 믿는(信) 사람이었네.}
깨닫자고 보리수나 박목(樸木) 아래를 떠나지 않을 건 없고
{무슨 나무면 어때}
마치 소가 그늘에 앉아 되새김질하듯이
그저 나무 밑에서 쉬다가 이미 걸어온 길과 그냥 지나쳤던 것들 돌아보면 좋겠다.
이제 뭐 ‘수하기(樹下期)’에 접어들지 않았는가.
사찰만 난야(蘭若, aranya) 아니고
마을과 조금 떨어졌지만 밤에는 아픈 애가 우는 소리가 들릴 만한 자리에서
내가 나와 다투지 않으면 될 것이다.
大休
솔바람 한 자락 샘물 한 줌이면 됐네
한 숨으로 큰 쉼 얻기
음악은 Wihelm Backhaus의 1959년 연주
Beethoven, Piano Sonata No. 31 in Ab Major, Op. 110
3악장 Adagioma non troppo-recitativo-adagio ma non troppo; Arioso dolen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