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기착지
칠월 보름, 한가위만큼이야 하겠냐만 달이 크다.
보름달 아래로 기러기 떼가 지나가는 광경 잡을 수 있을까?
풋, 삼각대도 없이 똑딱이로? 꿈은 야무져요.
지나가는 목에서 기다리는데... 아니, 얘들이 왜 안 오는 거야?
아무래도 딴 길로 샌 게다.
잘 됐지 뭐, 머리 위를 지나가는데도 못 담았다면 고가 카메라 사고 싶은 욕망 꿈틀댔을 테니까.
아니, 날아가는 애들을 어떻게 잡겠어? 가겠다는 사람 떠나기 전에도 붙잡지 못하면서.
다들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모습들 보면서 “나도 가고 있는가 보다, 도중에 있구나.”라는 생각.
움직이다가 마주치기도 하고 부딪히기도 하고, “어. 죄송합니다, 차라도 한 잔...” 그러는 것.
야 기러기들아, 너희들은 멀리서 보고 잠깐 관심대상-‘관심병사’는 아니고-이었을 뿐
서로 이름을 불러준 건 아니니까.
{이름 붙여 부르는 사이라도 그러네, 갈 때 되면 갈 데로 가는 거지, 따로 떨어져.}
휘영청 달밤엔 걸음이 휘청.
그거 참, 정신 말짱한데 웬 취보(醉步)?
게다가 내 그림자가 없다니, 가만있자 무영신법(無影身法)? {아무래도 무협지의 폐단이 큰 듯.}
이래서야 어디 월야독작(月夜獨酌)하는 이백(李白)에게 가겠는가?
옛적에 부르던 찬송가에는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것들이 많았다.
“나는 길 가는 나그네니”, “역려과객(逆旅過客)같은 내가”. “나는 순례자오니”
“뜬세상의 손 노릇도 잠시 동안 뿐일세”...
또 “이 세상의 소망 구름 같고 부귀와 영화도 한 꿈일세” 같은 것들도 있었고.
좀 허무주의적인 톤이긴 한데, 천년만년 잘 살겠다는 개꿈의 부질없음을 일깨워주기는 했지.
그런데,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네” 그러면, 내 집은 어디?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가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 11:13b-16a)
‘나그네’로 옮긴 헬라어 parapidemos는 다른 땅에 일시적으로 체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한국 전쟁 후 한동안 본적지가 아닌 곳에 가서 며칠이라도 머물자면 지서(支署)에 기류계(寄留屆)를 제출하고 허락 받아야 했다. 또 외국에 잠시 들러 가는 사람이라도 통과 비자를 받아야 되고. 그렇게 제한된 체재 기간만 머물 수 있는 사람이 나그네이다. 여기서 얼마를 살더라도 결국 떠나야 할 처지라면 ‘나그네’이겠네.
헬라어 paroikos라는 말은 어느 장소에 허가를 얻어 거주하며 외인 세(外人 稅)를 지불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이 땅에서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완수하고 세금 낼 것은 다 내면서도 결국 외국인으로서의 무능력과 수치를 감당해야 한다면, 그게 paroikos이다. {교민(僑民)이라는 말, 그게 좀 그렇거든.} Paroikos는 멀리 고국을 떠나 이방에 살면서도 그의 생각은 언제나 고향에 있는 사람, “고향 땅이 여기서 몇 리나 되나 푸른 하늘 끝닿은 곳”을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때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parapidemois diasporas, 벧전 1:1)들은 어디서나 그들의 눈이 예루살렘을 향해 있었다. 외국에 사는 그들의 회당은 예배자의 얼굴이 예루살렘을 향하도록 지어졌었다. 그대는 고향이라고 어디를 바라보고 있느뇨?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노라”(히 13:14)고 해야 하는데...
요즘은 믿는 이들(信者)도 영원한 도성의 본향 집을 바라보지 않더라고. 그리워하기는커녕 그런 게 있음조차 인정하지 않더라고.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 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이라는 말은 쏙 들어갔네. 여기밖에 없다니까, 이 삶 말고 없다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게 최고이고, 믿음이란 무엇이뇨 행동하는 욕심이로세.
{에고, 왕년 버릇 던져버린 줄 알았더니, 이게 무슨 소리...쯧}
여튼, 여기 좋다 해도, 떠나기 싫다 해도, 여기는 그저 중간 기착지. 오래지 않아 떠나야 하는.
기러기 보며 저도 “난 붙박이 아냐, 다리 위에 집 지을 생각 말고...”쯤은 깨우쳐야지.
아이들 조기유학, 부부 다른 근무지에서 취업, 등으로 기러기가족 된 이들 뿐만 아니고, 다들 기러기인 줄 알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