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편지 6 고정희 생가
예뻐?
그을쎄...
시 첨 읽고 “와우~” 그랬다.
얼굴 첨 보고 “아휴~” 그랬다.
다시 보고 싶어질 때쯤에 뱀사골에서 실족사했다고 그러더라.
{실족했다고 죽는다는 게 말이 되냐고? 난 발목만 삐고 말던데.}
좋아하는 지리산 품에 안긴 걸까, 아니면 승천한 걸까.
사진은 지리산이 아니고 근처의 두륜산
너무 늦었구나. 미안하네.
생가 옆에 기념관이니 문학관이니 성역화 해놓은 이들은 詩聖?
장흥 고씨 정희는 급에 미치지 못해서 손때 묻은 책 몇 권 남겨둔 마루방이 전부?
마당에는 현미와 고추를 말린다고 널어놓았다.
뒤뜰에는 보통 농가가 그렇듯이 감나무와 석류나무가 열매를 달고 있다.
“나를 얼마나 따랐는데...”라는 시인의 큰올케가 단감 몇 개를 따주시고
뒷동산에 있는 산소로 안내해주셨다.
나이 좀 먹은 적송들이 병풍을 이루고 있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페미니스트? 아니고,
저항시? 아니고,
그냥 착하고 눈물 많은 해남 여자
불쌍한 걸 지나치지 못하는.
묘소 앞에는 수수, 콩, 배추 그런 것들 자라 이제 거두게 됐다.
고요하여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심히 지나가는 출근버스 속에서도
추운 이들 곁에
따뜻한 차 한 잔 끓는 것이 보이고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수 앞바다 오동도쯤에서
춘설 속의 적동백 두어 송이
툭 터지는 소리 들리고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쓰라린 기억들
강물에 떠서 아득히 흘러가고
울렁거려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물구나무서서 매달린 희망
맑디맑은 눈물로 솟아오르고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그리운 어머니
수백수천의 어머니 달려와
곳곳에 잠복한 오월의 칼날
새털복숭이로 휘어지는 소리 들리고
눈물겨워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돌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 폐허의 처마 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 둘 트는 것이 보이고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살아있는 것들은 먹고살고 씨를 불려야 하니까
이 좋은 가을날에 분답잖을 수 없구나.
아, 정희 예뻐.
* 노래는 '그대 생각' (고정희 시, 이영례 곡, 소프라노 서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