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산 시비

 

보성 가서 차밭 한번 둘러본 후 벌교읍에서 꼬막정식이나 짱뚱어탕 먹고 나서 뭐 하겠냐고?

밥 때문에 들른 거니까 먹고 나면 갈 길 간다?

태백산맥문학관이나 부용산오리길 쪽으로 어슬렁거릴 수 있을 것이다.

{굽이쳐 느릿느릿 흐르는 강을 일자로 뻗게 하여 유속을 빠르게 하듯 여행할 게 아니지?}

 

부용산은 사람 이름으로 치자면 ‘철수’다.

{최근에 돌출한 ‘철수’가 있어 막 부르기가 조심스럽지만, ‘흔하다’는 뜻으로 아직 통할까?}

팔도강산 여기저기에 부용산이라 부르는 산들이 있는데

보성에 있는 부용산은 해발 96m, 아침에 텐트 친 정도 높이에 그게 무슨 산이라고?

 

어디까지가 얼굴이고 어디부터 머리냐고 그러면 세수할 때 물 닿는 데가 얼굴이라는데

듣고는 대머리가 발끈할 말이라서 이 또한 조심스럽지만...

무슨 표지판이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동네 언덕길을 올라가다가 물었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부용산으로 가자면 어디로...”

두 사람 째 모른다는 대답.

힝, 엄한 데서 찾는 건 아닌가 싶던 차에 세 번째 만난 사람의 대답인즉

“여그가 부용산인디 뭐땀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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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산오리길에서 내려다본 벌교읍과 벌판

 

 

작은 시비(詩碑) 하나 찾아 거기까지 갔던 이유?

모르겠다.

 

「부용산」은 빨치산 노래다.

헉? 근데 왜?

쩝, 긴 얘기 다할 것도 아닌데...

 

서정주는 ‘빨갱이 소설’「태백산맥」이 널리 읽힌다는 사실에 분통 터트렸다는데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한 시비에는 뭐라 변명했을지?

「태백산맥」은 군사독재가 끝나지 않았던 시기에 태어나서 잘 자라났지만(alive and well)

국가보안법 적용 여부와 이적 시비에서 벗어나기까지는 15년이나 걸렸다.

 

아아, 「부용산」!

“금방 빨치산 노래라고 제 입으로 말해놓고선!”이라고 닦아세우면 해명이 급해지는데

“그게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고 빨치산들이 불러서인데...”라고 우물거리다가는 매를 버는 셈.

그 노래는 사실 전쟁 전에 목포 등 전라도 서남 지역에서 짜했던 거라오.

모진 운명에 몰려 어쩌다가 빨치산이 되어 내일 어찌 될지 모르며 하루하루 사는 이들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노래, 애상과 궁기가 질질 흐르는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모았을 것이다.

더러는 비참하게 죽어간 동지들이 불쌍해서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에

목 놓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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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문학적 가치? 그렇게 나오면 할 말 없고

사연은 이렇다.

 

목포 항도여중-현, 목포여고-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던 박기동 시인은

1947년 벌교에 살던 여동생 박영애가 폐결핵으로 앓다가 죽자 제망매가(祭亡妹歌) 한 편을 토해냈다.

누이를 묻고 부용산을 내려오던 오빠의 마음과 가사를 연결하면 수긍이 가고

빨간 잉크로 체크할 만한 부분도 없다.

 

꼬이기 시작하는 대목이 이렇다.

동료교사로 가까이 지내던 안성현이라는 음악교사는 아끼던 제자 김정희라는 학생이 폐결핵에 걸려 죽자

박시인의 시 ‘부용산’에다 곡을 붙여 슬픔을 노래했다.

요즘으로 치면 히트곡이 되어 널리 부르게 됐고

그렇게 퍼졌던 노래가 빨치산들이 ‘아는 노래’로 계속해서 부르게 되었다는 얘기는 했는데,

그 작곡자는 그만 월북자로 분류하게 되었더라는 얘기가 보태진다.

{북은 예술 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최승희의 꼬임에 넘어갔다는 설도 있지만...}

그러니 빨치산이 부르는 노래에다가 자진 월북한 빨갱이가 지었다? 할 말 없는 거지.

{그것도 이상한 게,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등 그가 작곡한 노래들이 하나같이

‘나이브’할 정도로 사상을 담지 않은 동요풍이거든.}

 

실은 박기동 시인 자신에게 이미 ‘좌경’의 혐의가 드려져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끌려 다녔고 매 맞고 번번이 원고가 압수되어 시집 한 권 내지 못했다.

아주 뒤늦게 ‘서울의 봄’인가 하는 때가 되어 그는 해외로 나갈 수 있어 호주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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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 근처에는 위리안치(圍籬安置)라도 하겠다는 듯이

탱자나무가 자라 울타리를 이루기도 했다.

 

 

채보(採譜)할 수도 없는 구전가요로 근근이 이어오던 노래였는데

1997년에 안치환이 ‘작자미상’의 ‘부용산’을 음반에 취입했다.

1998년 2월14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논설고문 김성우의 ‘부용산 오리 길에’라는 수필이

‘부용산’을 조명하며 “불러도 괜찮아”라는 합법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시인에게 부탁하여 53년 만에 2절이 추가되었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렇게 완성된 것을 소프라노 송광선씨가 ‘목포 부용산 음악제’에서 먼저 불렀고

여러 가수들이 제 풍으로 불러 레퍼토리에 넣었다.

 

문학성, 음악성으로 ‘부용산’을 재단할 건 아니라고 그랬지.

그냥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의 세월에 몰려 억울하게 살았던 이들의 사연과

또... 현재진행형의 갈등과 대립, 오해와 왜곡, 원한 확대재생산의 되돌이표가 딱해서 말이지.

 

아, 시비가 건립되어 제막식인가 하는 날 박기동 시인이 초청된 건 당연한 일,

작곡자 안성현의 부인, 남편의 생사를 알길 없이 오십여 년을 삯바느질하며 사신

송동을 여사도 오셨다고 그러더라.

박 시인은 결국 시집은 펴내지 못했고 ‘부용산’이라는 잡문집 하나 내고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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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박기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