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밭에서
시인과 농부 사이에 원만한 사회적 계약 같은 게 이뤄져
필요한 존재로 인정하고 서로 도움 받으며 무시하거나 시기하지 않고 살면 좋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조불러’-e조선일보 부설 블로그 상용자-들을 흉보며
이만큼 지녔고-재산이든 지식이든-, 이런 데 다니고, 이런 걸 먹고, 이런 걸 할 줄 안다는
자기 자랑에 서로 추어주면서
깃이 같은 새들끼리 모이는 살롱 문화에 끼어든 필자를 살짝 비난하였다.
손을 내저으며 부정할 것도 아니고 입꼬리에 쓴웃음 달고 가만히 있었다.
조선블로그가 노인정 같다는 얘기도 있는 줄 알지만, 어쩌겠는가
젊은이들이야 거친 태클을 즐긴다 해도 뼈마디 약한 사람은 힘없는 이들 동네에서 놀 수밖에.}
시보다 삶이 먼저 있고 삶에서 시가 나오는 것이니까
아무라도 시를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부잣집 도령이 툇마루에 앉아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 같이"를 읊듯이
문드러진 손가락에서 지문이 뜨지 않아 주민등록증 갱신을 못했다는 노동자의 울음도 노래이다.
아픈 사람이 아프다는 얘기 자꾸 하는 게 듣기 좋겠는가, 마찬가지로
누리지 못하는 이들의 분노의 한숨도 일부러 들어주겠다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그런 것들은-'진실'이 듬뿍 담겼다 하더라도- 상업적 목적으로 대량 복제되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시인?
일찍이 박노해(기평)의 깃발 날림이 있었고
요즘도 '희망버스'에 연료를 공급하는 '운동' 성향의 시인들이 더러 있을 것이고
잡초류의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잠깐 놀라게 한 김신용 같은 이들도 있었다.
{드러나지 않아 그렇지, 많을 것이다. 눈여겨보지 않으니 '이름 없는 들풀'이지만.}
농부시인?
부유한 연금생활자들이 전원주택을 짓고 들어와 거창한 귀거래사를 토해낸다고
농부시인이라 할 건 아니지.
어쩔 수없이 새나오는 한숨과 아우성치지 않고는 미칠 것 같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삶의 기록들
읽거나 듣고 흥이 나지 않는, 해서 "그게 무슨 시라고?" 취급당하는 것들
"유통을 위해 만든 건 아냐" 그러면서도 내놓고 보는 이들이
아주 없지는 않더라고.
양파밭 매다가
감자밭 매다가
돌아서 양파밭 매고
또 돌아서 감자밭 매고
논에 갔다가
집에 갔다가
또 논에 갔다가
밭에 가는데
니미럴! 낮잠 자다 하품 하냐
뻐꾸기 우는 소리 너무 한가해
내 발걸음도 느려진다
-박형진, '오월'-
뽑고 돌아서서 또 뽑고
다시 돌아서면 또 잡초...
김매기뿐만 아니고
농부만 아니고 너 나 없이
애씀의 덧없음 때문에 던져버리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터.
달아,
솟아 콩밭에 비추거라
해지면 한 그릇의 보리밥처럼
소쩍새가 울고
낫 잡은 손은 보이지 않으니
이 콩밭은 언제 다 벨까
달아,
솟아 콩밭에 비추거라
풀섶에 내리는 차가운 이슬,
어둠처럼 몸은 지쳐
지쳐 식구들 기다리는데
이 풀들은 언제 또 다 벨까
달아,
솟아 콩밭에 비추거라, 너마저
뜨지 않는 밤 너마저
뜨지 않는 밤
노래 부르네 나는 노래하네
콩밭에 두고 가는 내일의 고달픔을
풀섶에 묻고 가는 안타까운
내 사랑을
-박형진, '콩밭에 비추거라'-
{까짓, '콩밭'이라는 말 꺼내자고 이리 오래 걸렸는가
앞에 쓴 거 다 지워버릴까...}
콩밭 빛깔 예쁘더라.
노랑, 해바라기, 밀밭, 부처님에게 입힌 금칠, 고흐의 노랑... 뭐 그런 게 아니고
거둘 때 됐나 돌아보게 하는 시월에 물든 콩잎, 그 빛 참 곱더라.
개었어도 맑지는 않은, 틈나면 울어버릴 것 같은 하늘 바라보다가
북한산 둘레길이나 다녀오자고 나섰는데
'흰구름길'이나 걷고 점식 먹자는 것이 어떻게 탐방길로 들어서서
칼바위, 대동문으로 이어졌다가 원점회귀가 싱거워 구기계곡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에고 무릎이야, 배도 고프고... 그런 꼴이 되었지만...
겨울 숲은 좋더라.
적갈색조차 채도를 잃어가다가 무채색으로 되고 말 것이다.
노출 한 단계 높이면 건강미가 돋보이겠지만
그렇게 되면 슬픈 이야기는 빠지게 되지.
초점 조금 흐려서 뭔지 알아볼 정도만이어도 되지.
{그냥 젖은 눈에 흐리게 다가온 모습, 눈 비비고 확인할 필요 없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