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2
집밥을 못 먹는 사람들은 밥집에서 먹을 것이다.
반찬 가짓수가 모자라고 내세울 솜씨 없어도 ‘가정식백반’이라는 이름을 붙여
헛헛한 몸과 마음을 어렵잖게 불러 모으는 실비집들이 널렸다.
그런 데는 혼자 와서 합석한 상에 끼여 먹는 이들이 쌨다.
혼자 먹는다는 게 좀 그렇지...만
밥 먹는다는 것만 해도 어딘데?
조잡한 복사판의 밀레의 <만종>, <이삭줍기> 등 ‘이발소 그림’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조선인들의 명화감상 나들이의 노둣돌이 되기도 했는데
국민화가 박수근이 소년 적에 그림쟁이로서 뜻을 세우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니
전혀 유치한 것만도 아니지.
그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교인 아니라도 좋아하던 그림이 있다.
굳은 빵 한 덩이를 앞에 놓고 기도하는 노인의 모습.
밥 먹고사는 사람이 하필 ‘빵’이라고 그랬는지
김현승의 <아침식사>는 혹시 그 그림 보고 지은 게 아닌지?
내 아침상 위에
빵이 한 덩이,
물 한 잔.
가난으로도
나를 가장 아름답게
만드신 주여.
겨울의 마른 잎새
한 끝을,
당신의 가지 위에 남겨 두신
주여.
주여,
이 맑은 아침
내 마른 떡 위에 손을 얹으시는
고요한 햇살이시여.
불평 없이 세끼 해대는 아내도 있고
맨밥조차 맛있게 먹는 사람이니
‘맛집’ 찾아다닐 이유가 없고
인공조미료에 중독될 만큼 저질입맛은 아니거든.
헌데,
‘냄새에 약함, 배탈 잘남, 비윗살 全無’ 수준에
땀 냄새 같고 밥 냄새 같은 사람 맛을
먹고 또 먹어도 당기고 허기지게 하는 힘으로
규정하는 모순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나?
차기야 했겠냐만 스쳐가도록 내버려뒀으니
새삼스레 떠올릴 이름 기억나지도 않겠는데
정 주는 게 두렵지도 않고
{말하긴 좀 그래도} 다시 고파지기도 하는 거 아닌가?
하기야 그 옛날 陶淵明이 이미 그러지 않았는가
人人惜其情 有酒不肯飮
“사람들끼리 정 주기를 꺼려하고 술이 있어도 (함께) 마시기를 즐기지 않는다”고.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고
좋아할 만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렷다.
어떤 사람을 싫어하게 됨은 좋아할 수 없는 것들이 눈에 띄어서이겠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빼고 ‘이외 건질만한 것들’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수박을 깨지 않고서는 그 수박 맛이 어떤지 모르겠고
생긴 꼴만 보고서는 상황버섯이 좋고 값나간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알고 보면 좋기도 하겠지만...
사랑하면서 알게 되기도 하지만
알고 나서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
첫눈에 {음, 그런 말 잘 모르지만, 필이 꽂혀?} 딱 좋으면 사랑에 빠지는 게 순서이겠네.
좋은 사람은 나한테만 좋아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다른 이들도 좋아할 것이고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가 나만 좋아해야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게 {사랑까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래 일단 호감 정도라고 해두세}...
독점욕으로 차단할 수 없는 상대의 빛살들이 뻗침을 배신이라고 단정할 수?
{힝, 연애는 좋지만 좋지 않게 되는 것!}
새벽에 혼자 나와서 ‘아침 됩니다’를 써 붙인 집을 찾아다니는 건
좀 그렇잖아?
싸락눈 着地하는 소리가 귀청을 때리는 초저녁
“아직 안 들었으면 나오지?”라는 꼬드김에
들고 있던 밥술 놓고 나갈 수 있으면
됐네.
{겸상하고 있던 반려가 봐준다면 말일세...}
각 일병이면 딱이지만 그것만 시킬 수는 없지
휘엉청 달이 밝다고 언제 한번 휘청한 적 있는가
落花인들 꽃이 아니랴 지르밟음이 죄송하여
골라 디디는 moon dance, 그야 우리 주특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