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에서

 

이틀 자기로 하면 사흘 여행이 되는 건데

무박이일이니 그런 여행도 있다는데

출근시간 혼잡을 피하여 서울 탈출을 늦게 잡으면 가는데 하루, 돌아오는데 하루

꾸물거리다 늦게 나와 조금 움직이고는 촌에서 어두워지면 뭘 하겠어 자는 거지

그러다보면 이박에 반나절 여행? 그런 건 없지.

가는 길 오는 길을 다 즐기고 과정이 좋다 해야지

목적지-그런 게 어딨어?-에서 보거나 해본 건수로 알짜(?) 여부를 가릴 건 아니지.

{살아온 길 돌아보니 과녁이 없었구나... 쯧. 화살 날리고는 떨어진 데에 동그라미를 그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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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군은 남북 길이가 95km에 이르는 반도인데

팔영산 바라보며 내려갔다가 내나로도(동일면) 거쳐 외나로도(봉래면)까지 가서 우주센터를 보고

배꼽 위치에 있는 읍에 들러 밥 먹고 고흥 출신 천경자 화가 판화 전시관을 둘러본 후에

우주천문과학관에 올랐다가 투덜거리며 내려와-오후 2시에 개관- 소록대교와 거금대교를 거쳐

거금도(금산면) 오천마을에 이르면... 양다리 발가락에 입 맞춘 셈이 되는데

날은 어두웠지요, 눈이 퀭하니 고단하지요, 섬 밖으로 나올 기운은 떨어졌지요, 어카갔시오?

적당한 숙소를 찾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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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은 우주다? “Hi Seoul”보다 못하지 않은 이상한 구호지만, 알았다고 해두고

고흥은 지붕 없는 미술관? 어딜 봐도 그림이 되니까 “옳거니” 그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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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은 설끝이 길어 많은 식당들이 문을 열지 않았다.

벌교 장터에서 대갱이와 꼬막도 들고 반도에 들어와서는 소문난 갈비탕... 그런 건 다 헛꿈.

어느 집에서는 매생이국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손히 인사하고 나오니까 뒤에다 한 바가지 끼얹더라.

어둑해서 다행히 한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키지도 않은 피꼬막을 생각해서 내줬는데 두어 점 들다가 옆에서 혐오스런 시선으로 몬도가네 취급하는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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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은 파랗다? 이리 봐도 물, 저리 봐도 물, 땅에는 온통 마늘, 간혹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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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파라니까, 또 따뜻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여름이랄 수는 없으니까

짧은 봄 깜빡 꿈이 여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긴 그리움으로 돌아갔던 세월을 보상하지 못하겠지만

어쩌겠는가, 게으른 눈물 한 방울 떨어지기 전에 얼른 “그만하면 됐어요.” 해두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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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넘이와 해돋이를 함께 볼 수 있는 데 와서 저녁 먹고 나오니 이미 꼴깍 했기에

다음날 어둠 가시기 전에 일출 보겠다고 떨며 기다렸지만, 이미 그른 줄 알고도 떠나지 못했지만

해는 수평선에서 떠오르지 않았고 뒤늦게 구름 위에서 아직 붉은 얼굴 잠깐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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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빛이 검었다가 붉었다가 금색 나돌다가 은빛으로 바뀔 때쯤 되면

노역에서 놓여난 늙은 어머니들이 햇볕 쬐러 나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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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유로 일에서 면제된 듯한 아저씨 한분, 내 나이에도 미치지 못했겠는데

‘김일 동상’을 보여주겠다고 졸라 가서 보니까, 응? 그건 ‘국조 단군상’ 아닌가?

금산면 출신 프로레슬러 김일 덕분에 섬에 일찍 전기가 들어왔다고 해서 은인으로 추앙하는 건 알겠는데

금색으로 도장한 단군 좌상을 가리키며 김일이라고 그러면?  멍...

가만 있자, 좀 닮기도 한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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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한 주일 전에 뽑은 새 차 시승 겸해서 작전반경이 늘어났던 셈인데

섬에서 나오기도 전에 앞 타이어가 찢어지고 말았다.

비상타이어로 갈아 끼우고 나서 다리를 건너는데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바다가 육지라면... 그런 노래들 시효가 상실한 즈음에도

그 왜 “이어질 수 없을까”라는 막연한 바람과 더불어

앙금을 뽀얗게 떠올리게 하는 가재의 발길이 시작되니까 가슴이 두근거리네. {모를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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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에서 타이어를 가는 동안 앞을 보니 ‘와온해변 11 km’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들르지 못하고 그냥 가려니 맴이 쪼깨...

순천완주고속도로를 타니까 구례, 남원, 임실을 지나게 되잖니, 지리산을 끼고.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식의 울컥!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