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에서
이미자, 조용필, 백건우 등 대단한 분들이 공연차 소록도 다녀가셨다는데
부족한 제가 아직도 가보지 못해서...
뜻은 좋지만 아무나 가는 데가 아니니 자책할 필요는 없다.
요즘은 접근성이 좋아져서 많이들 찾는다는데
단, 일반에게 공개된 구역인 중앙공원 정도나 둘러볼 수 있다고.
환자들의 노역에 의해서 만들어진 중앙공원의 정원수들
나병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지지 않았는가.
{아 politically correct term으로는 ‘한센씨병’이라고 해야 하는 줄 알지만
오늘 여기서는 ‘나병’과 병용함을 스스로 봐주기로.}
나병의 전염경로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셈이지만
환자와 지속적인 접촉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전염될 가능성은 희박하단다.
한국에서는 한센병이 종료되었다고 1992년에 세계나(癩)학회에서 선언했다.
예전에는 환자를 격리 수용함으로써 전염원이 차단된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오래토록 ‘소록도’라는 특별환경이 존속했을 것이다.
시작은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의 한센병 환자 격리수용 조치가 그대로 적용되어
1916년 소록도-작은 사슴(小鹿)같이 아름다운 섬-에 ‘자혜병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몰아넣게 되었다.
소록도에서 바라보는 ‘바깥세상’, 위 사진들의 좌우 끝은 소록도
慈惠라... 이름은 그랬지만
그건 ‘인권유린’이라는 사치스런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지옥이었다.
길게 늘어놓을 것 없고 사진 몇 장 올린다.
{관심 있는 분들은 검색해보거나 그러고 나서 마음이 끌리면 방문하시게.}
감금실, 검시대 및 묶고 단종 수술 하던 대
유전적으로 열등한 형질이 자손에게서 재현되지 않도록
한센병 자체가 유전되는 것이 아닌데도 수용 환자들에게는 斷種(단종) 수술이 강요되었다.
{일본에서는 한센병 환자들이 격리정책으로 인권을 침해당했다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고
2001년 5월 구마모토 지방법원은 정부의 피해배상책임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항소 포기를 선언했고
일만여 명의 환자와 유족들에게 환자 일인당 800만∼1400만 엔씩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한센병을 앓았던”이라고 길게 붙이지 않고 ‘문둥이 시인’이라고 하면 얼른 떠오르는 이름 한하운.
“가도 가도 황톳길”로 시작하는 ‘전라도길’, ‘보리피리’, ‘파랑새’, ‘추야원한’...
다 곡이 붙어 노래가 되었다.
그는 또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라고도 했다.
未堂이 뭘 몰라서 그랬겠는가마는 당시 그런 소문도 돌았는지...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딸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 밤새 울었다.”
소록도에서 인애와 자비를 펼친 무명의 천사들이 한둘이 아니겠으나
잊지 않을 이름으로 먼저 꼽히는 이들이 마리안느와 마가렛(Sisters Marianne Stoeger and Margareta Pissar)이다.
간호사 자격을 가진 20대 후반의 두 수녀는 1962년에 와서 43년을 섬기고 고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소록도에 뼈를 묻겠다는 약속은 어긴 셈이지만
“나이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도 없고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뜻으로.
국내외 언론이 그들의 선행을 알리려고 소록도를 찾았지만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고
전달된 수백 장의 감사장과 공로패는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돌아가 세 평 남짓한 방에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고 써 붙여놓고 소록도 꿈꾸며 사신단다.
할 말 길어 시작한 게 아니고, 그냥 다녀왔다는 얘기 남긴 겁니다.
평화의 기도 (서울모텟)
파랑새 (한하운 시/ 금수현 곡/ 테너 팽재유)
보리피리 (한하운 시/ 백창우 곡/ 정태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