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 때문에

 

알지 못하는 이가 곁에 있게 되었다고 같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15시간쯤 걸리는 태평양 노선 만석 기내에서 옆에 앉은 이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견디듯.

 

있지 않음(不在)은 여기 나타나 있지(顯在) 않음이라는 뜻이지 아주 없는 건 아니거든.

임재(臨在)는 종교용어로 되긴 했지만 높은 분이 특정지역을 방문한다는 뜻.

그대 곁에 없음으로 인하여 그대 내 안에 있음이 분명해졌다면 그건 대체 무슨 존재양식?

 

그대 향한 긴 그리움 계속 키우기만 해야 할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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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나서 기다림의 실체 파악으로 배신감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기르던 수염 밀어버렸을 때처럼 아깝긴 하더라고.

그럼 다시 기르며 기록 갱신을 시도할지

날마다 새로 깎은 턱에 로션을 바르며 “비벼도 될까”를 상상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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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떨어져 있던 사람 반긴다고 프리지아를 꽂아두었다.

꽃집에서 사온 긴 대가 더러 꺾여있기도 하지.

그렇게 고개가 꺾인 건 쓰레기통으로 직행?

그을음만 내는 심지를 비벼 끄지 않는 그분의 아낌이 아니었다면 어찌 살아남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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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에 픽 쓰러졌다가 낮잠에서 깨어나듯 말짱해지는 머릿속

더 누워봤자여서 일어나 앉았는데

앗, 그게 어딜 갔지? 아무래도 seat pocket에 두고 내린 게야...

작가수첩도 아닌데 괜히 명작의 산실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것 같은 상실감.

주머니가 여럿 달린 여행가방의 지퍼를 수없이 여닫다가 이쑤시개에 손끝이 찔리기도 한 끝에

  {바느질로 그리움 지우려다가 “아야~” 하듯.

  그러면 한 방울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래도 짜면 보이게 되는 핏빛 응집, 그 후 씀벅씀벅.}

아하, 여기 있었구나... 드디어 찾았네.

보물까지는 아니지만 이 대견한 걸 잃을 뻔... 그러며 안을 들쳐보는데

그건 맛집 정보, 여행지에서 가볼만한 데 등을 적은, 스마트폰 없는 이의 아날로그 방식 깨알노트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못하는 저질 메모장이었다. 공들여 쓰지 않아도 될 기호 같은 악필로 채운.

 

버릴까?

시시한 것들, 놓치면 아까운 것들,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도 무의미한 것들, 없다고 생존에 지장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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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람과는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로 시시덕거리며 즐거워하고

그저 그런 사이는 의미 있는(insignificant) 대화를 나누는 동안 좁혀지지 않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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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감각으로 구성되었거든.

그러니 느끼는 한 느끼는 주체와 느낌의 대상이 있는 거지.

느낀 것들이 추상화로 정리되기도 해.

 

서책에도 나오지 않는 시구 꼬물꼬물 기어 나오기에 어디다 써둘까 하다가

하늘 아래 새것 없고, 자작시도 아니고

그냥 뜻 모를 분절음 몇 개가 백지에 쏟은 자식 가능성처럼 아까울 것도 없어

“감각은 살아있으니까 또 하면 되지” 그러며 버리기로.

 

 

나 혼자 다니는 길 아니어서 한밤 지나 사람들 쏟아져 나오면 현장보존이 어렵지만

범죄처럼 다가왔던 영상들 따로 보관할 수도 없어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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