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기 블루?
선친보다도 이태 위이신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는 좀 그렇지만
음도 뜻도 좋은데 그렇게 불리지 않는 호 ‘樹話’로보다는
보통명사는 아니라도 국보를 지칭하는 이름처럼 되었으니 그냥 김환기라 하고...
전시회를 다녀오면서 ‘환기 블루’라고 부를 별난 색깔이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다른 빛깔을 안 쓴 것도 아니고 피카소의 청색시대 같은 걸로 묶을 연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보다 중요하게는 청색이라고 다 같은 한 색이겠냐는?
나라말치고 한국어처럼 형용사가 발달한 게 있냐고 하며
푸르다, 파랗다, 퍼렇다, 새파랗다. 시퍼렇다, 푸르스름하다, 파릇파릇하다, 푸르딩딩하다...
분식센터 차림표보다 긴 목록을 댈 수 있겠지만
막상 다른 색조 두 가지만 들이대고 뭐라고 부르냐고 물어도 마땅한 ‘이름’이 없더라고.
“靑出於藍靑於藍”이라는데 어느 게 청색이고 어느 게 남색이냐면 대답할 사람이 몇이게?
쪽빛(濃藍)을 영어로 ‘indigo (blue)’라고 하는 줄 안다고 해도 그런 물감은 고르지 못하던 걸.
{Cornflower blue는 우리말로는 뭐라 부르나? Jan Vermeer가 즐겨 택했던.}
하늘빛? 날마다 다르고 때마다 다른 하늘을 두고 “하늘빛!” 그러면 알아듣겠냐고?
물빛도 그렇고.
그러니 신세대의 은어, 인터넷/ SNS 통용 조어뿐만 아니고 기본어휘가 늘어나야겠네.
‘한국(조선, 고려)의 빛’이라고 할 만한 게 딱 집어 뭐라 하긴 그렇지만
{빛(光)은 빛깔(色)이라는 꼴(態)을 이루는 깔(性)이지만
나타난 걸로 말하기가 쉬우니까 빛깔을 ‘빛’으로 부른다고 해서 잘못될 것도 없겠다.}
잠깐 들렀던 게 아니고 한참 살다가 떠나고 나면 어떤 빛깔이 가장 그리워질까?
왜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라는 노래가 있었지?
I'll never love blue eyes again...
눈동자가 갈색이어서 사랑한 게 아니고 사랑한 사람의 눈동자가 그러고 보니 갈색이었기에
남겨진 기억 때문이리라.
“그대 아청빛 눈동자에 고인 하늘을/ 나는 날마다 표주박으로 떠마신다”라는 시구도 있다.
{이가인, ‘아청빛 눈동자’ (전문)}
랭보(Arthur Rimbaud)가 열다섯 살에 지은 시 ‘감각(Sensation)’이
“Par les soirs bleus d'été, j'irai dans les sentiers,”로 시작하는데
“여름날 푸른 저녁나절에”쯤으로 해도 될 것을 굳이 ‘아청빛’으로 옮긴 글도 있더라고.
鴉靑이라... 날이 기울어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그러나 노을이 침투하지 않은 하늘빛이라면
아청이라 해도 되겠네.
그런 눈빛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같이 하늘을 바라보다가 돌려 아직 바라보고 있는 눈을 보고는 생긴 기억일 것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같이 바라보다가 한마디 건넸다.
“저기 고흐의 자화상 같은 얼룩이 보이지 않아?”
“정말 그러네...”
{그거야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호기심에 확인하고 싶은 분은 갤러리 현대로. 모레 끝남.}
그걸 그의 ‘1번’으로 쳐야할까? 선뜻 동의하기는 좀 그러네.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는, 그래서 ‘무제’라고 그러고 만, 마지막 해(1974년)에 빼낸 실로 지은 고치들
다 좋더라! 아주 좋더라!
{‘뉴욕시대’의 추상화들은 인터넷으로 떠돌아다니지도 않아 옮기지 못하지만...
볏짚 빛깔의 ‘점’-면적을 지니니 블록이라 해야 할지-들로 이룬 건 꼭 들어오더라.
‘품지 못한 그대’를 두고 떠나는 발걸음 같아 되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