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영월 지나며

 

봄비는 봄비 같아 봄비라고 그러면

정의(定義)하는 말이 정의할 말과 같으니까 말이 안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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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혼해서 동음반복, 동의반복을 하게 되는 게 아니고 그보다 분명한 게 없으니까.

 

‘그립다’ 생각하면

‘그립다’ 생각하는 아지랑이.

‘아!’ 하고 또 속으로 소리치면

‘아!’ 하고 또 속으로 소리치는 아지랑이

 

 -서정주, ‘아지랑이’ 중-}

 

다들 봄비가 뭔지를 아니까

봄비는 봄비다워야 봄비임을 인정하니까

사람이라고 다 사람 아니고 사람다워야 사람이라고 말하면 알아들으니까

봄철에 들어서서 봄을 확정지으려고 내린 비겠지만

간밤에 내린 비는 봄비답지 않았고

그러니 “봄비 아니었어” 그런다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라는 반론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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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1000m가 넘는 언덕배기 바람맞이에 세운 집 꼭대기 층에 들었는데

바람비 몰아치는 밤 내내 문짝은 덜덜거리고 홈통이 떨어졌는지 낙수가 폭포소리를 냈다.

그래도 잘 잤다.

아침, “오 밝은 태양 너 참 아름답다”로 햇볕이 쨍 난 건 아니고

끄느름한 하늘에 작은 구멍들 더러 났는지 생각난 듯 빗방울 가끔 떨어졌지만

우산 펴들고 다녀야 할 정도는 아니다.

 

 

간밤 궂은비로 꽃들은 어떻게 됐을까?

 

우리가 후끈 피워냈던 꽃송이들이

어젯밤 찬비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힘드실까봐

저는 아프지도 못합니다

밤새 난간을 타고 흘러내리던

빗방울들이 또한 그러하여

마지막 한 방울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습니다

 

-나희덕, ‘찬비 내리고 -편지 1’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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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 꽃 얘기 아닌 줄.

그래도 겨우내 힘 모아 피어낸 꽃들은 눈에 밟히지 않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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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읍 지나 통리재 넘어서면 태백이 되는데

웬 기차가 그리 자주 다니는지 건널목 차단기가 수시로 내린다.

기다릴 것 있나, 옆에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서면 칼국수집과 설렁탕집이 있다.

식성 따라 어느 쪽을 골라잡아도 평균 이상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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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에서는 한우 한 번 먹어줘야 하는데

‘실비 집’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싸게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무게야 다 그러려니 하고 속아주는 것

맛은 괜찮다.

 

고갈두(고등어구이 + 두부), 순두부 같은 음식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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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룡소 오르는 길은 아직 눈으로 덮였다.

{유월 초 들꽃세상일 때 다시 찾고 싶지만...}

한강 514km 민족의 젖줄이 발원하는 곳이라면 꼭지라고 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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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거나 기대기엔 아직 어린 자작나무들

거기서 ‘너는 내 것’이라고 따로 고를 것도 아니라서

(바쁜 걸음이지만) 몇 그루 쓰다듬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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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정골사리를 모셨다는 정암사 적멸보궁으로.

관광버스로 온 이들 따돌리려고 급하게 올라가다가 수마노탑 앞에서 숨이 턱에 닿아 헉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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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심이 깊어서도 아니거늘 하루에 적멸보궁을 두 군데 들르게 되었다.

 

영월 법흥사 가는 길에 미륵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는데

그 앞을 흐르는 주천강 일대의 바위들이 희한하게 깎였다.

조각도는 세월일까 강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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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사 약사전 마당에서는 구봉대산의 와불이 보인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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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가도 절을 가도

뭘 믿는 걸까? 뭘 바라는 걸까?

약한 인간이 복을 바라며 재앙을 피하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다고 치고

그럼 기복면앙(祈福免殃)이 전부인지?

{“구경꾼은 저리 가라” 그러면 할 말 없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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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에서 원주로 나가자면 황둔을 거치게 되는데

횡성 안흥찐빵만큼 알려졌는지 모르겠으나 나름 찐빵거리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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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빵 한 상자 챙겼지만 끼니는 그걸로 안 되는지 길가 곤드레밥집에 들어갔는데

주인아줌마는 TV 켜놓고 잠드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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