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dolce vita
세 달 가까이 산후 휴가를 얻었던 딸이 출근하게 되자 제 엄마에게 SOS
{에고 친정어머니의 팔자가 그렇지, 딸이 좋다고 해도 그게...}
도리 있나, 가는데, 비행기로 몇 시간, 그러고도 차로 다섯 시간.
오지에 사니 모처럼 해먹일 것 챙겨가는 짐이 산더미-김치, 깍두기에 냉면 꾸미, 만둣국 고명까지.
할아버지는 그럼? 삼식이는 슬프다.
혼자이어 좋다며? 이젠 안 그래.
마음이 안 잡혀 우왕좌왕, 그러다가 끼니 사이가 점점 짧아지며 이것저것 꺼내 먹으니
설거지할 게 늘어난다.
이렇게 자주 물 묻히다가는 주부습진? 아니면, 어렵던 시절 가여운 어린 식모가 그랬듯이 터진 손?
상황이 그런지라 일없이 뉴스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졌고
그러는 중에 Anita Ekberg가 별세했다는 소식까지 접했네. 향년 83세(1931, 9. 29 – 2015. 1. 11).
그녀가 누구냐? 몰라도 돼. 아니 말해놓고서는...
Miss Sweden 출신의 배우. {그래, 몰라도 된다.}
아래 오른쪽 사진은 2007년의 모습.
그렇구나, 예쁘다 해도 젊을 적에 그랬다는 얘기.
그러니 허사가(虛事歌) 노랫말이 딱 그거네.
홍안소년 미인들아 자랑치 말고 영웅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마라
유수 같은 세월은 널 재촉하고 저 적막한 공동묘지 널 기다린다
크고 작은 역을 맡아 여러 영화에 출연했지만,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지게 된 것은
펠리니(Federico Fellini) 감독이 만든 ‘달콤한 삶(La Dolce Vita, 1960)’에서이겠다.
Sylvia 역의 Anita Ekberg가 트레비 천(泉)(fontana di trevi)에 옷 입고 뛰어드는 장면이 인상적이긴 하나
그녀는 여러 조연 급 중의 하나였던 셈이고
Marcello Mastroianni가 하는 Marcello Rubini가 주역(主役)이었다.
그는 로마 상류사회(the rich and famous)의 스캔들을 나르고 퍼뜨리는 기레기인데
그냥 알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이 끼어들기를 원했고 그럭저럭 그렇게 된 셈으로
파티와 여자를 좇는 퇴폐적인 삶을 이어간다.
{영화 ‘달콤한 삶’의 내용을 얘기하자는 건 아닌데...}
영화는 생뚱맞게도 거대한 예수 상(像, statue)이 헬리콥터에 매달려 옮겨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건 뭐 재림(再臨), 공중 강림(降臨) 같은 게 아니고 바티칸으로 이송(移送) 중인,
말하자면 사람들 사는 데를 떠나 성지(聖地)에 갇히려고 압송되는 듯한...
그러고는 신(神)이 떠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 1, 2, 3... 식으로 에피소드가 전개되는 셈이다.
Marcello는 지인(知人) Steiner의 저택에서 열린 파티에 초대받아 그의 삶-겉뿐이겠지만-을 들여다보면서
내게 없는 것을 다 가진 Steiner를 존경하고 그의 삶을 부러워한다.
없는 게 없는? 그게 소비주의, 물질주의, 향락주의가 추구하는, 거기다가 지적 분위기와 명예를 덧칠한.
그 Steiner가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로 마감하는, 그러니 많이 부족한 삶을 산 거네.
뭐냐고, 가진 게 말짱 헛것이면?
이래도 그렇고 저래도 그렇고
그러셨잖아, “네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생백년 산대도 슬픈 탄식뿐 우리생명 무엔가 운무(雲霧)로구나
그 헛됨은 그림자 지남 같으니 부생낭사(浮生浪死) 헛되고 또 헛되구나
몇 해가 지났을까 Marcello의 귀 뒤에 흰 터럭이 더러 보일 즈음 어느 날 아침
모래밭에 웬 가오리? {그것 참, 맨 첨과 나중 신(scene)이 아주 엉뚱하단 말이지}
그 죽은 가오리 몸통이 구경거리가 될 만큼 꽤 큰데
크면 뭐 하냐고? 그렇게 죽고, 그렇게 밀려와서 그런 꼴이나 보여주고.
Santiago-Hemingway 작(作)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가 잡은 청새치(marlin)처럼
“그거 엄청 큰 거야, 본 중에선 제일 큰”이라는 기록이나 남기는.
‘성취’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남들이 “우와~” 했기로서니?
{그렇다고 “Vanitas vanitate,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만 주절거릴 건 아니지만.}
아 그리고... 쟤 누구지, 맞아 그때 레스토랑에서 보고 ‘천사’라고 불러줬던 Paola구나.
그런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파도소리가 커서 뭐라고 그러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그런가?
요희(妖姬)와 천사(天使), madonna-whore의 이분법으로 다룰 건 아닌데... 에고 이 얘긴 관두자.}
이건 딴 얘기지만...
사랑하면 그리워하게 되잖니, 곁에 없어서도 아닌데 늘 부재(不在)를 느끼니까.
그런데, 천사와는 그리워할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겠더라.
천사는 몸이 아니니까.
멀리서 보고 미소를 나누는 거지 소통이 가능하지는 않으니까.
동경(憧憬)의 대상이고 영감(靈感)을 환기(喚起)한다고 해도 만질 수(tangible)는 없으니까.
짠, 짠, 짠 마레가 말 타고 달리는 장면과 함께 나오는 FIN? 아니고,
그래도 못 다한 말...
뭐가 달다고? ‘달콤한 삶(la dolce vita)’을 가능케 하는 것?
그러니까, 행복한 삶이 뭐냐는 질문.
달기만 하면 달지 않더라고.
너무 달면 으으으으, 진저리~
그걸 쾌락주의의 역리(逆理)(the paradox of hedonism)라고 그러던가.
일부러 쓴맛을 더할 건 아니지만. 단맛에다가 쓴맛을 섞어 중화(中和)시키는 게 아니고
쓴맛 돌지만 그래도 단, 쓴맛에서 찾은 단맛, 그냥 달기만 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단,
영어로 ‘bittersweet’이라고 하면 “괴로움이 따르는 즐거움, 희비가 엇갈림”을 뜻하고,
왜 우리에게는 오미자(五味子)-쓴맛, 신맛, 단맛, 짠맛, 매운맛이 다 있다는-에 익숙하잖니?
그렇지 뭐, 행복이라 해도 괴로움이 배제된 채 즐거움만 누리는 것은 아니겠네.
사랑도 그렇잖던가, 어둠은 빛 때문에 생긴 것, 어둠 때문에 빛을 찾게 되고 그리운.
“Good news도 있고 bad news도 있는데, 어느 쪽을 먼저 들을래?” 그러면
일단 좋은 소식 먼저 들어보고, 그 다음은 귀 막지 뭐? 제 맘대로?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마음으로 가면 될 거라고.
{아, 마이크 잡은 김에}
신(神)이 떠난다면, 아니지 신을 덜어낸다면 더 살기 좋은 세상 될까?
신을 마치 hidden camera나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 정도로 여기며 추방하면, 모든 게 가능하다?
아닐 걸.
{음, 정말로 한 곡조만 더 뽑고}
꽃이 피었다가 금세 진다고 아름답지 않은 건가?
오래 가야 좋은 거라면 조화(造花)가 더 가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짧기에, 가버릴 것이기에 한숨짓지 말고 뜬세상(浮世)의 길손 노릇도 즐겁게, 아름답게!
왕창 깨지고도 춤추듯. The Lord of the dance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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