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찌의 계절은 너무 짧아
벚꽃뿐만 아니고 버찌뿐만 아니고
과정 중의 한 단계만 집어내어 보자면 그렇게 짧을 수가 없지.
꽃은 열매를 내고
열매란 살이 붙었든지 없든지 씨이고
씨는 싹을 내고
싹은 자라 꽃을 달게 될 것이다.
그런 거니까
그렇게 돌아가니까
영화 한 편 끝나기 전에 어느 한 장면에서 눈물 훔칠 거 없고
다 보고나서도 그렇지, 그건 ‘이야기’일 뿐.
하긴 이야기라도 그러네, 삶과 떨어져 지어낸 건 아니고
모든 이야기는 살아감을 풀어낸 거겠네.
한참 지나고서 돌아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으니까
평가할 건 없고 그냥 느끼고 받아들이면 되겠네.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를 준비하여 복수하려는데
당장은 다시 보고 싶을 뿐, 지나간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네, 내 참.
봄꽃은 지고
수국은 거듭 빛깔을 바꾸는데
봄이 아주 간 건 아니라서
거리에는 축제가 한창이다.
거리는 젊은이들로 넘쳐나고
축제의 흥청망청에 편승하여 고백 없는 만남도 남발되리라.
언제나 그렇지는 않겠지만 미술관도 무료입장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 “나 무슨 파 아니거든” 화가들 작품
들여다보며 냄새 맡을 수도 있고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주의 따로 없더라.
근데 이건 뭥미? 걸작인겨?
이내 사라지는 것과 오래 남는 것, 버려도 되는 것과 두고두고 보관할 것
잘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