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거기 관가정 뜰이었던가
석류꽃 떨어지고 앵두 익어가던 때가 이맘때였지 아마?
옥산서원 가는 길 양옆으로 자리 잡지 않은 모들이 힘들게 줄서있던 논들하며
회재(晦齋)가 둘째마님과 살던 독락당 밑으로 시원한 물줄기 흐르던 때가?
그때 모란은 지고 말았던가?
청계천변 이팝나무만 보던 사람에게 내버려두면 그만큼 자랄 수 있다고 으스대던 나무에게 알아주는 척하고
모처럼 평안한 바다 바라보던 때가 빨리 달아오른 초여름 어느 날이었지?
이때쯤 한결 짙어진 녹음을 두고 “참 푸르구나~” 하는 것은
증공(曾鞏) 아니어도, 정지상(鄭知常) 아니어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
一番桃李花開後 한바탕 복숭아꽃 살구꽃 흐드러지더니
惟有靑靑草色齊 푸르디푸른 풀빛으로만 깔았네
사월 분홍 꽃들 오월 흰 꽃들 가고나면 산야는 한동안 푸르기만 할 것이다.
꽃 진 자리에 열매들 달리고
일찍 떨어지지 않은 것들에는 단맛이 들 것이다.
복숭아 얘긴데
복숭아 좋아하는지 복숭아 얘기하길 좋아하는지 성석제가 흘린 구절인데
삼천 세를 살아 비로소 모르네라
풋복숭아 절로 붉어지는 일
-‘초여름’ (전문)-
연구, 계획하여 식단을 짜는 게 아니고 쉽사리 구하고 조리할 수 있는 걸 먹다보니
육류 섭취가 많아졌다.
콜레스테롤 주의하라고 그랬는데...
해서 한 끼를 토마토와 냉수만으로 지나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좀 부족한 듯해서 복숭아도 좀.
한국보다 많이 싸서 과일 사먹을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보기만큼 맛도 좋지는 않더라고.
이동거리가 길고 잘 물러터지는 거라서 익지 않은 걸 땄기에 그런가
단맛이 없더라고.
신맛도 없더라고.
줄줄 흐르는 과즙 핥아먹는 재미가 없더라고.
사구(砂丘)에 해당화 피어나는 날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향수는 며칠 더 가면 여독(旅毒)처럼 가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