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발칙 시인’이라는 말을 썼다가 태클이 들어와서 얘긴데
‘발칙’이라는 말의 발칙함은 인정하지만...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발칙하지 않았던가?
초기 성공의 늪에 갇혀있는 한 아직도 발칙하지 않을까?
그 시집이 나오던 해(1994년)에 나는 외국생활 이십년이 넘어가고 있었고
여성시인이라고 하면 겨우 고정희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즈음인가 조금 나중인가 신경숙과 공지영이 뜨기 시작했지 아마.
서른에 잔치는 끝났다?
무슨 잔치? 잔치가 서양에서의 축제에 해당하는 말이라 치고
서른 지나면 祝儀에 참여할 수 없거나 생리적으로 祭祝(festivity)을 누릴 수 없게 됐다는 뜻?
그건 아니지
인생이 어디 잔치 같겠냐만, 언제나 축제처럼 살 수는 없는 거지만
서른 지난 사람은 삶으로의 강제에 저항하지 못하고 끌려간다는?
서른이면 설었는데, 맛 들지 않고서 “앞으로는 그저 ‘꽝’일 것이다”라고 할 수 없는 거지
거 참 맹랑하네...
{이상, 중학생 때 “vanitas vanitate”를 부르짖다가 그 후 성취가 없었던 사람의 근심.}
사실 標題詩의 내용은 그렇지도 않았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로 시작했음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사랑과 운동의 병행과 교차, 지나고 보니 그 어느 쪽도 말짱 헛것이더라는.
‘이념’이 아니라 ‘날 것-사람-’이 좋아 따라다니다가 사람도 그저 그렇게 되더라는.
그런 일 반복되리라는 걸 감지하지만,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시집 제목을 그렇게 뽑아야 했을까
그게 시인 맘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있겠고
실제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는데 일조했을 것 같다.
어쨌거나, “‘안(non)-발칙’이었어요”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시샘이 섞인 성난 시선에 대하여 시인은 오히려 “그래, 그렇다면 어쩔 건데?”로 나왔더랬지.
‘마지막 섹스의 추억’이라, 그 ‘마지막’이 “바로 지난”인지 “더 이상 없을”인지 모르겠으나
그거 좀 과하구나.
“어느 놈하고였더라”는 ‘슬픈 카페의 노래’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지하철에서 1’
그런 것들 도발 아냐? 약 올리고 나서 공격해오기를 기다리는.
아 뭐 메타포, 이미지, 그런 말들 주워듣기는 했는데
未堂 선생이 그러셨다대.
“애욕 많고 이빨 좋은 젊은 사람이여, 사과를 꼭 하나만 먹고 더 먹고 싶은 것을 절제하고 보라”
{과다한 채택과 표현을 경계한 말씀이렷다.}
헤헤, 뭐 막힌 데 뚫리는 듯한 기분도 있었네.
못 볼 걸 봤다며 얼굴 가리고는 손가락 사이를 벌리듯 그렇게 “저런, 저런...” 하면서도
“나는 못 하지만 너 참 용하다”는 부러움과 격려가 있었지.
시로 대박 나서 전업시인으로서도 살만한 가능성을 보여줬던 경우가 서정윤 정도였을까?
과격한 도발을 최영미가 독점하였다면 그녀도 ‘넉넉하게’ 시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실험에 성공해도 특허출원이 안 되면 독보적 지위는 보장할 수 없으니까.}
격문의 시작 같은 「돼지들에게」도 더 이상 사람을 끓게 하지 못하던 걸.
언젠가 해외에서 발행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주간지에 본국 월간지에서 발췌한 내용이 실렸더라
시인이 곤궁하고,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는 인터뷰 기사.
눈물이 핑 돌더라고, “자네 같은 사람은 기죽으면 안 돼지.”
“내 마음은 허겁지겁/ 미지근한 동정에도 입술을 데었고/ 너덜너덜 해진 자존심을 붙들고/
오늘도 거울 앞에 섰다”(‘茶와 同情’)는 시인에게 뭐랄 수가 없네.
“五十而知天命”이라는 말은 공구 선생은 그러셨다는 뜻, 보태어
“그럴 수 있으면 그래야 할 것이야”라는 뜻이지
쉰 살이면 다 그리 되더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곱게 늙었다”는 얘기 들을 수 있고
(내가) 예뻐하는 사람은 (내게) 늦게까지 예쁘더라만
보통 여자 오십이면 미모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때 아닌가?
지성의 평준화? 그런 것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특별히 가르치거나 연구하는 직업군에 속해있지 않고서는 가방끈의 길이는 쓸데없더라고.
‘身老心不老’의 다섯 자를 두 자로 줄이면? 주책.
그러니 나야 그 경지를 넘어선 거지, ‘返老還童’은 무협소설에서나 등장하는 헛소리.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사는 이유’)는 시인에게 사는 이유를 제공할 만한 사람도 아니지만
1961년 생 오십 줄 시인에게 “이제 좀 다른...”을 눈짓으로만 주문해도 되겠는지?
하긴 「서른, 잔치는 끝났다」도 모노크롬은 아니었다.
이런 건 파스텔 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않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가을에는’ (부분)-
그리고,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Noise marketing을 한 것도 아닌데 논란의 중심에 있다는 건 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인데
뭔지 몰라도 좋은지는 아는 사람들에게 신경질부릴 것 없다고.
지금은 아니야
나는 내가 완전히 잊혀진 뒤에 죽겠어
알지는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자들에게
무덤에서 일어나 일일이 대꾸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최소한의 자존심’-
그래 ‘난대로 생긴대로’ 살고, 또 그렇게 쓰는 거지
일부러 醜美와 僞惡을 내세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소리 높일 이유도 없네.
세상이 아름답다 말한다고
지구가 더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간판들로 둘러싸인 광장에서 큰 글씨로
꽃과 나무와 더불어 숲을, 숲에 묻혀 사는 낭만을
예쁘게 찬미할 수 없다 나는-
밖에서 더 잘 보이게 만들어진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눈을 감고 헤엄치는 나의 언어들은-
요리사 마음대로 요리하기 쉬운, 도마 위에 오른 생선.
솜씨 없이 무딘 칼에도 무방비일지언정
내 시에 향수와 방부제를 뿌리지는 않겠다.
자신의 약점을 보이지 않는 시를 나는 믿지 않는다.
-‘눈 감고 헤엄치기’-
또 그랬지.
비평가 하나 녹이진 못해도
늙은 작부 뜨듯한 눈시울 적셔 주는 시
구르고 구르다 어쩌다 당신 발끝에 채이면
쩔렁!하고 가끔씩 소리 내어 울 수 있는
나는 내 시가
동전처럼 닳아 질겨지면 좋겠다
-‘시’ (부분)-
그래, 그래서 내게까지 왔나보다.
오래 되어 닳았어도 액면가치가 떨어지지 않은, 더 버티면 골동품의 부가가치가 붙는
시를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시간 좀 썼네.}
시인은 왜 소설가, 화가, 조각가, 무용가, 예술가처럼 ‘家’가 아닐까?
‘~家’가 ‘그것을 전문적으로 하거나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나 ‘그것에 능한 사람’을 가리킨다면
시는 누구나 쓸 수 있고 특별한 직업으로 여기고 전념하기 어려워서 ‘~人’에 머무는 걸까?
최영미 시인이 뭐하고 어떡하고 사는지 나는 모른다.
미술사 책도 펴냈고-전공이 그러니까- 축구 칼럼, 기행 서적도 냈다-광팬이니까.
다른 잘하시는 것도 많으리라.
바라건대, 내용적으로는 ‘詩家’이었으면.
{詩聖, 詩仙 같은 칭호의 諡聖은 자격요건을 갖추고 한참 세월이 지나야겠지만.}
춘천 가서 좋다하다가 또 이사하신다는데
‘좋은 내 집’으로 가셔서 건강하게 잘 사시면 좋겠다.
12일(화) 저녁 7시 카페 ‘사카’에서 최영미 시인의 시 낭독회가 있다고 한다.
{사카는 7호선 강남구청역 4번 출구 나와 역진, 건너지 말고 오른쪽으로 100m 정도 버스정류장 앞, 02-516-6430}
시모임 ‘淸談’, 청담동에 있어서만 아니고 시인들은 아니지만 모여 淸談을 나누는 사람들,
계간으로 모이는데 벌써 열네 번째라네.
작은 모임인데도 이름값으로 치면 대단한 시인들이 다녀가셨다.
나도 한국 체류 중 몇 번 들렀는데, 참 좋더라.
‘나는 시를 쓴다’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최영미 시, 이건용 곡, 전경옥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