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文集)
난 학자가 아니니까 유명 학술지에 연구논문 발표한 횟수나 저서 등으로
실력을 평가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왜 책을 안 내느냐? 그런 질책성, 격려성 질문을 가끔 받기도 한다.
당황, 할 말 없음, 그래서 미안함.
핑계라면 핑계, 그러니 듣고 나서 핍박하지 말았으면 좋겠네.
저작, 그게 제자나 자손들이 사후에 모아 내놓거나 하는 것이지 어찌 제 손으로?
가까운 친구니까 준대서 받아온 어르신네의 문집, 그게 좀...
그래도 이사할 때 버리기는 미안하더라.
선친은 미수(米壽)에 시작(詩作)을 시작-‘試作’이라 해야겠네?-하셨다.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당시 신문에 연재 중이던 장영희님의 ‘영미시 산책’의 영향이 아닐까 싶기도.
시 쓰기에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주문하곤 하셨는데, 싹싹하지 않은 아들에게 묻기도 뭣해서 그러셨으리라
이태준의 ‘문장강화’? 그런 게 왜?
둔부가 아파 앉지도 눕지도 못하시면서 혹은 손수 쓰시거나 도우미에게 구술하시어 몇 수 남기셨다.
시뿐만 아니고 장편(掌篇)도 좀.
어느 저녁에 교정을 해달라며 원고를 내놓으셨는데
“나 이만큼 쓰는데... 네 보기엔 어떠냐?”라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붉은 표시가 너무 많은 것을 보시고는 언짢은 표정을 지으셨지.
이삿짐 싸며 내가 적어둔 메모들이야 까짓 거...
그래도 아버님께서 파지나 광고전단 뒤에 쓰신 글 조각들은 챙겨왔다.
어떡하지? 정리해서 한 권으로 묶는 것이 불효에 속죄라도 하는?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어렵게 해드렸다.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남기신 글들 중에...
유월이라서...
‘산나리’
저 편은
얽히고설킨 잡초 넝쿨
그 아래는
오물 진창 도랑
이편은
번듯한 사람의 길
그런데 어느 날
그 넝쿨 속에 피어난
두 송이 산나리
허울 좋은 미남처럼
쭉 뻗은 미녀처럼
부끄럼도 없이
이겨낸 사랑을 즐기고 있네
그 잡초 넝쿨 아니었더면
그 오물 도랑 아니었더면
심술궂은 손끝에 꺾였으리라
그 장애물이 방패와 축복되어
서로의 피어남과 만남이 성사되었지
그 기구한 운명에서도
제 소임 다 하여
이웃을 기쁘게 한 산나리처럼
아프고 슬픔 있어도
뻗고 솟아날 구멍 있나니
하늘 쳐다보며
내 소임 다하여 보세
함께 웃어 보세나
여행 중 보니 미국 동부 정원이나 길가에는 나리가 지천이더라.
북한산에서 채취한 수수꽃다리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약간의 개량을 거친 후에
‘Miss Kim’ 라일락으로 개명하여 들어오게 되었다고 분통 터트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원예종 day-lily 중에는 한국 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추리 개량종이 많다.
며칠 전 어머니 기일.
가족들 같이 있지 않아 딱히 추도회를 가진 것은 아니나
흘끔흘끔 사진 보니 이런저런 옛 생각이 꾸역꾸역 솟아나온다.
어머니 먼저 가시고 22년을 남아 계셨던 아버님께서 이런 글을 남기셨다.
‘내가 없어봐’
어느 부부의 주고받은 말이다
내가 없어봐 당신 꼴이 무엇이 되나
당신 말이 맞아
당신 없으면 나도 없는 거지
하기야 당신이 있기에
나도 있는 거지
우리 같이 잘 삽시다.
그래요 우리 같이
이렇게 손잡고
우리 사랑 보여 줘요
누가 그러시더라.
“아들이 죽으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니
마누라가 죽으니까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남명 선생(南冥, 曺植)이 지은 글 중에 시제(詩題)를 굳이 달기도 그래서
‘만성(漫成)’이라 한 것도 있다. 심심한 차에 한 수 지었다고나 할지.
또 ‘우음(偶吟)’이라 한 것도. 그냥 떠오르는 대로 읊어봤다는 뜻.
{그분뿐만 아니고 한가한 양반들이 “별 거 아니지만...” 그러면서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은}
그렇지 뭐.
블로그 글도 그런 거지.
닫았다 열었다 할 것도 없고, 열 낼 일도 아니고.
노인이라기는 좀 그렇지만... 손 놓은 양주(兩主)가 유희로 시간을 죽이며
종일 같이 있어 거북하다면서도
생각해보니 “그대 없이는 못 살아”일 것 같기도.
어쩌다 좋은 저녁에 육이오 등 옛 이야기를 길게 하셨다.
-유월, 전투 끝난 고지에 올라갔는데 여기 저기 흩어진 시신들 썩는 내가 나는데
그 지독한 냄새를 덮는 향기가 있더라. 하얀 꽃이었는데...
-작은 꽃들이 다닥다닥 붙었던가요?
-그런 건 기억 안 나. 제법 컸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아마도 산목련이었지 싶습니다.
-몰라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