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하느님은 天을 가리켜 ‘하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니까 그건 범신론
한 분이시니까 마땅히 ‘하나-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는 게 불통 수구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잘못된 맞춤법’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얘기.
그러면 묻지, 하늘을 섬기는 게 잘못됐다면 하나(Oneness)를 섬기는 건 괜찮은 거야?
바로 그분, 유일무이한 그분-사실 하나님 아니라도 무릇 존재란 다 유일무이하지만-께서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으셔서,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지 말라고 그러셔서
대제사장이 “야훼”라고 지성소에서 부르기는 했지만 일반인은 그럴 수 없어서
“주님”, 혹은 “나의 주님(Adonai)”으로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부르지 않으면 오시지 않을 것이고 不在-그러니 空이고 無이겠네-에게 대고 기도할 순 없지.
여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와 사랑하게 되면 그 이름을 부르지
“여자야~”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냥 기호나 코드명은 아니고
그 왜 있지, 김춘수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처럼
꽃이 되고 의미가 되고 사랑이 되고, 으응 그저 ‘꼭 그 하나의 있음’이라고 해두자고
그렇게 존재를 창조하는 격발장치가 이름이다.
자, 숙, 순, 옥, 희, 혜... 그런 이름으로는 구별-따로 세움-짓기가 좀 그렇겠다.
어쩔 수 없이 순자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해도 왕년의 ‘백설공주’처럼 ‘順子’가 아니고
뜻이야 뭐 평범한 좋은 말이 다 그렇지만 ‘淳慈’쯤이라도 되어야 그래도
“순자라고 다 같은 순자 아니거든”으로 꿈틀거리는 시늉을 할 수 있을 거라.
태극, 을지, 충무, 화랑, 인헌, 무공훈장에 등급이 있듯이
‘관계’에도 우선순위가 있어서 얘긴데
{“오직 나하고만!”이 아니라고 심통 부린다면 말이 안 되지
우리는 다각 구도라는 관계의 그물집(web) 속에서 살고 있잖니.}
가장 좋은 사람이라면 ‘가슬’ 쯤으로 부르게 될 것 같다.
이름 얘기 그만하고... 그래 하늘 말이야, 하늘.
{하늘이라 하느님이라 한 건 아니라고 그랬지, 아마도 처음엔 한-님, 한아{아래 아 점으로)-님, 한울-님이었을 거야.}
구름 위로 올라갔다고 하늘보다 높이 올라간 건 아니고,
하늘은 정의상(by definition) ‘가장 높은 곳’이고
실제적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 그러니 알 수 없는 곳이다.
‘곳’이라고 했지만, 뭐랄까 인격적인 ‘뜻’으로 알아들어도 되겠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9)
하늘을 피할 수 없고
하늘을 버릴 수 없고
하늘이 맑지 않은 날은 내게만 그런 게 아니고
하늘이 활짝 갠 날 그늘을 찾고 싶은 사람도 있겠고
하늘은 닫히거나 열리거나 하지 않고
{On/ Off의 조작 스위치가 없지}
언제나 거기 하늘로 있어
네 가는 길 지켜보며
그게 아니다 싶은 때에도
그저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지만
마음에 주름 잡힘은 어쩔 수 없어
때로는 신음으로 간간이 눈물로
일깨워주긴 한다만
가지 않을 길을 가야 할 길이라고 우긴다면
막지는 않는단다
하늘을 미워할 수 없고
그럼 사랑할 수는 있는가, 해도 되는가?
따름, 따를 따름
따르면 눈이 열려
이끌림이 보이고
오래 참고 기다리심 그 마음에 뛰어들어
아마도 빗물이겠지... 하늘에서 내리니까
그릿 시내에 물이 마르면?
사르밧 땅으로 가게 하셨다. (왕상 17:7, 9)
모자가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만큼 남긴 밀가루 한 줌으로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함께 여러 날 먹었으나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다하지(盡) 않았다.
죽은 자식까지 살려냈으니...
그런 것이다.
“그 노여움은 잠간이요 그 恩寵은 平生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寄宿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 30:5)
타는 목마름으로 대지가 신음하더니
쏟아질 때는 정신없이 퍼붓고
“그래 모처럼 문 열었으면 채울 만큼 내려주시오” 그래도 이내 시치미 떼는 하늘
무슨 조화인지 알 수 없구나.
이유를 물을 것 없고
살아남으니 됐다.
조마조마했지만 나름 좋은 일도 더러 있었고
그저 감사할 따름.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 8:22)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