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좀 살살

 

Speak Low

영화관에 가는 걸 즐기지 않으니 나들이 못하는 아내로서는 불만이겠네.
{혼자 가도 될 텐데...}
영화관의 분위기랄까 그런 게 맘에 들지 않거든.

게다가 증폭기에서 나오는 소리는 왜 그리 큰지?
깨어있는 동안에는 이어폰을 신체부속물처럼 부착하고 사는 젊은이들에게는 그쪽을 선호할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일정 데시벨을 넘어서는 소리가 괴로울 뿐이다.
영화 상영 내내 귀를 손으로 꽉 막았다가 조금 열었다가 하며 볼륨을 내가 조절한다.

요즘은 보청기 좋은 것들도 많더라마는
“난 귀가 절벽이라” 하시며 소통 부재를 안타까워하시던 외할머니 생전에는 쓸 만한 게 없었다.
식구들이 모여 있을 때에 돌아가는 얘기에 끼어들기를 원하셨는데
무정한 이들이 소리 질러 뭐라 해도 듣지 못하시는 건 마찬가지, 입맛만 다실 뿐.
잇따르는 불평, “아 목이 다 쉬었네, 할머니와는 상관도 없는 얘긴데 왜...”
그런데 어쩌다가 효심이 발동하여 할머니 귀에 입을 대고 소곤소곤 속삭이면
알아들으시고 “아하, 참말이고?  허허허허...”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

긴 얘기 왜?
너무 커서 못 듣는 소리가 많다는 거지.
속삭이면 알아들을 얘기를 질러대는 바람에 “내사 먼 소린지 통 모르겠고마”가 되고 만다는 거지.

그야 아예 안 듣겠다고 귀 막는 사람에게야 뭐라 한들 듣겠는가?
예전에 어떤 사람이 반대하는 이들에게 자기의 신념(?)을 지키겠다며 마이크 대고 한다는 말이
“기차야 짖어라 개는 달려간다”이었다.

지도자가 그러면 쓰나?
눌린 자의 신음과 빼앗긴 자의 저항을 듣지 않겠다고 작심하면
해줄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을 가진 사람은 변명만 해대거나 아예 딴전만 피고 말 것이다.

눈물 흘릴 때에 돌아보지 않으니까 악써대기 시작했고
소리가 커지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게 되고
안됐다고 여기지만 손길 내밀지 않았던 사람들은 소음의 피곤함 때문에
“거기 그만하지 못할까?”로 짜증내게 되었다.

그게 지나간 해의 거리 풍경.

우리 소리 좀 줄이자.
수도공동체 식구들이 제가 말 전하려는 사람에게만 들리라고 말하듯 낮은 볼륨으로 부드럽게
그래서 간접흡연의 피해처럼 듣지 않아도 될 이가 고통당하지 않도록 소음이 줄어든 세상 되었으면.
 
듣지 않겠다는 사람, 들을 수 없다는 사람이야 어쩌겠는가?
그래도 들으라고 고함치지 말자.
골라서 듣겠다는 사람 내버려둘까?
아첨소리가 워낙 커서 여린 소리는 묻히고 말겠지만, 그래도 말 건네자.  여전히 여리더라도.

사랑해봤기에, 지금도 사랑하기에, 사랑을 아는 사람은 세미한 음성을 듣더라고. 
행여... 싶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정호승, ‘풍경 소리’) 그러지 않아도
마음 닿게 되더라고.
때때로 저 혼자 지나가는 솔바람 소리(“松風時自過”-徐令壽閣, ‘送人’)도 때마다 잡히더라고.
그 누가 기꺼이 사립문 두드리는가(“柴門誰肯爲相敲”-柳方善, ‘雪後’) 설중매 향기가 다가옴도 알겠더라고.
임이 오시나보다, 누가 울고 있나 보다, 어떻게 해줄 수 없을지언정 그거 다 알긴 알지.

강추위에 꽁꽁 얼어붙었더라도 “가만히 귀대고 들어보면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
봄은 물밑작업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아는 이들은 다 안다.
겨울 한복판에서도 봄의 신앙(Frühlingsglaube) 지닌 사람은 다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