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사랑할 건 아니지만

 

 

상처는 남은 아픔일까, 아픔이 남긴 것일까?

{PTSD, 아니면 이제는 덤덤히 바라볼 수 있는 흉터 내지 자랑스레 내보이는 훈장?}

그러니까 현재진행형이냐 과거완료냐의 차이이겠는데

과거가 밀려와 현재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돌연 출현한 고립된 순간은 아니니까

아픔이 남긴 것이냐 아픔이 남은 것이냐 따질 것 없이

의식하는 한 상처는 지속하는 아픔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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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당긴다.

{구어체 발음대로 “땡긴다”고 그래야 얻어먹을 텐데.}

별나라, 시가 뭐라고? 톡 쏘는 맛도 없고 시원하지도 않은데.

 

그래서 시집을 사면? 후회하지.

표제시에 끌려 주문하고 배달된 걸 일별하고는

“뭐야, 자장면 잘한다던데 다른 요리는 수준 미달이네”라는 투덜거림.

 

예전에 동네시장에서 수박 살 때 그런 일 더러 있었잖니

삼각형으로 도려내 보여주는 수박 속은 벌겋던데, 집에 와서 갈라보면?

거기다가 빨강 잉크를 注入한 거 아냐?

 

무슨 대표작이 따로 있겠냐고?

그러니 시집에 뭐라 광고 카피 같은 이름 붙일 게 아니고

{기사나 블로그 포스트 제목조차도 딱 미끼 같은 걸 달더라고.}

‘김00 詩帖 1’ 정도로 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다가 마감에 쫓긴 청탁 원고 같은 것을 아깝다고 끼워둔 게 아니라면

어디를 들춰봐도 그저 그만한 고른 품질의 작품들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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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보기는 하지만 그래도 새 노래들 듣고 싶어서 신간 시집 몇 권을 주문하는데

주문서 마지막쯤에 보니 배송비가 권당 13,000원. 아니?

해외탁송화물, 그것도 비싼 Fedex로, 그러니 송료가 좀 나가리라는 건 각오했지만

시집이라야 8,000원인데, 그리고 시집 몇 권 합해야 다른 책 하나 무게쯤 될 텐데.

“그거 몇 푼이나 된다고...” 옆에서 쪼잔남에 대한 피식거림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시집이라면 조국에 계신 분 중에 해외동포 문학애호노인에게 이런 쪽지와 함께

“새 책은 아니고 읽어보니 좋아 손때 묻은 걸 보내노니 읽고 나서...” 쯤을 기대할 수?}

 

소설가 윤후명이 쓴 「소설가 Y씨의 하루」에 이런 구절이 들어있다.

“소설가 Y씨는 예전에 시를 썼다고 한다

요즘은 안 쓰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 ...)

헛소문일지도 모른다”

헛소문이 아니고 그는 시집 두 권을 내었고 먼저 시로 신춘문예에 당선, 등단했고

이십 년 만에 세 번째 시집을 들고 돌아왔다.

주문서에서 최종 탈락한 비운의 시집들 중 하나.

 

그래도 살아남은 시집이 하나 있는데,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라는 anthology.

실천문학사의 ‘실천시선’이 32년 만에 200호를 맞으며 그동안 출간한 시집들 중에서

대표작 하나씩을 뽑아 엮은 것이다.

‘아 광주!’의 1980년 이래 암흑의 심연에서도 문인은 할 줄 아는 게 ‘쓰기’밖에 없어서

옥중시, 저항시, 노동시, 농민시 등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그런 내용

혹은 조악한 은유로 나중에 도망갈 여지를 남기고 꿈틀거리는 시늉을 했거든.

말은 이렇게 하지만 70년대 초에 한국을 떠난 나는 동참하지 못하는 미안함에

재미도 없고 불편하기만 한 그런 시집들 꼬박꼬박 사서 읽어주기나 했다.

“그렇다고 ‘참여’ 때문에 서정성이나 예술적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거든”이라고 항변할

시인들도 여럿 있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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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런 시인들의 작품 중에서 한 편씩 뽑아 모은 꾸러미의 포장지에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라는 상품명이 붙었는데

뭐 그게 그렇게 처절한 몸부림씩이나 되느냐 하면

나종영 시인의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가 표제가 된 셈.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

 

작은 풀이파리만한 사랑 하나 받고 싶었을까 나는

상처가 되고 싶었네

 

노란 꽃잎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병든 몸이 뜨거워지고,

나는 사랑이 곧 상처임을 알았네

 

지난 봄 한철 햇살 아래 기다림에 몸부림치는

네 모습이 진정 내 모습임을

 

노랑붓꽃

피어 있는 물가에 서서

내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나는 사랑했으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내 안에 있음을,

나는 상처를 사랑하면서 알았네

 

 

나는 맞장구쳐 줄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그랬구나” 그런다.

내가 날 두고 생각해봐도 맹랑하여 할 말 없으면 “그렇구나”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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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꽃자리 같은 것.

꽃자리? 花紋席의 다른 말이겠지.

공초 시인의 작업용 멘트, 구상 시인이 명문화한 글줄 있잖아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誤用인 줄 알지만, 꽃 진 자리의 준말쯤으로 통할 수도 있겠는지?

 

생각한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꽃잎들이 떠난 빈 꽃자리에 앉는 일

 

그립다는 것은 빈 의자에 앉는 일

붉은 꽃잎처럼 앉았다 차마 비워두는 일

 

애늙은이 문태준 시인의 명문 ‘꽃 진 자리에’이다.

 

꽃이 떠난 자리 말고 떨어진 꽃이 깔린 자리를 생각하다가 그리운 쓴 웃음 스친다.

이런 얘기, 중 2 어느 날 풍금 치며-페달 밟자면 오리가 물갈퀴 젓듯 부지런히 운동해야 되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Comin' Thro the Rye.

보리밭에서 나왔다고 웃지 말아라~ ♪

그런데 어머님께서 그런 ‘나쁜’ 노래를 부르냐며 언짢아하셨다.

“학교에서 배운 원본 가사가 그런 걸요, ‘나아가자 동무들아’는 ‘동무’가 들어가서 안 되고.”

“정말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쳤는지 가서 알아볼 테야.”

“내 참... 그러시든지. (씩씩)”

보리밭에서 나쁜 짓(?)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던 시절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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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은 없지만

배롱나무 꽃잎이 떨어진 자리로 와볼래?

{호습기는 또 을매나 호습간디...}

꽃나무 아래 앉았다가 꽃물 든 걸 알고서 대범한 척

“마침 분홍 원피스라 괜찮다”고 그럴 것이다.

{에고, 나들이옷으로는 단벌 맞빨이인 줄 다 알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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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안 붙는다고 무작정 펼쳐대는 상상마당 그만 접고...

아 상처 얘기였는데 그만...

 

그렇더라, 뭐든지 생명 있는 건 그냥 자라는 게 아니고

Quantum이랄까 그런 비약-눈에 띄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의 단계를 거쳐가는데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더라도 매듭이나 흔적을 남기더라고.

그걸 상처라고 할 수 있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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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씩이나?

그냥 “그렇구나!” 하는 거지.

八苦쯤 아니고 그저 그런 만남과 헤어짐, 뭐 거기까지도 아니고 마음과 몸이 움직인 궤적

다 상처라면

그냥 안고 가는 거지, 버릴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