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주문한 책들이 왔다.
보고 싶었고 기다렸는데 일별하니 그저 그렇다.
뭘 기대했는데?
그래, 별 거 없다고.
책 많이 읽는 이들 기특해. 정말 재미있는가보네. 난 그냥 그렇더라.
수집벽? 그러면 모은 걸 지키기라도 할 텐데, 난 버리잖니.
{사람은 그럴 수 없겠네. 무슨 순애보 같은 것 하나 남기고 싶어.}
시집도 끼어있는데 수록한 게 다 절창도 아니고
그때 좋은 시 따로 있지만, 그것도 언제나 좋은 건 아니니까
“한 때는 많은 날을 당신 생각에 밤까지 새운 일도 없지 않지만” 같은 7.5조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算 놓고 無盡無盡 먹세그려” 같은 사설시조, 가사체
그런 외기 쉬운 것들 몇 개 머리 속에 넣고 다니면 되지
시집 모아 뭐 하겠냐고.
{시집? 늘 후회해. 1965년에 구입한 Palgrave가 엮은 ‘Golden Treasury’ 빼놓고는.}
시로 뭐 하겠냐고?
제목만으로는 Alfred Tennyson의 ‘Tears, Idle Tears’의 패러디 같은 정현종의 ‘시, 부질없는 시’처럼
시로써 무엇을 할 수 있겠으며, 왔다가 간 줄도 모르는 아름다움을 알아채지도 않지만
혼자 아름다우면 된 거지, 내가 뭐라고 할 것도 아니지.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그저 예쁘기만 하면 되는 시
쓸 만한 게 없다는 푸념은
예쁜 것도 없더라는 얘기겠는데
그럼 왜 아침저녁으로 챙기느냐고? 조간, 석간 종이신문 집어 들듯이.
나희덕이 그러대.
“아침의 노래가 날아오르는 새들이라면 저녁의 시는 내려앉는 나비들입니다.
아침의 노래가 무릎을 일으켜 세워준다면 저녁의 시는 등을 가만히 쓰다듬어줍니다.
(... ...) 수많은 아침과 저녁을 지나왔지만 아직도 아침과 저녁 사이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합니다.”
볼 것도 말 것도 없이 뻔한 것들
그래도 버려뒀다가 다시 들었을 때에 “응, 이걸 왜 못 봤지?” 그런 게 꼭 있더라고.
별나지 않은 것은 시시하다. “이런 천한 것들~” 소리를 듣기도 하고.
그게 日常이고, 生必品이다.
들어맞지도 않고 쓸 데도 없는데 별나기에 귀티 난다고 따로 모셔두는 게 웃겨.
예쁜 꽃만 꽃 아니고
꽃은 다 꽃이다.
꽃이면 다 예쁘다.
{蟲媒花는 나름 뭔가 끄는 힘이 있지 않겠는가?}
사람이면 다 좋은 사람?
얘기가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지만
시라면 다 좋은 시?
그렇다고 해두자.
난초가 꽃대 올리듯
{아니다, 아직 이름 없는 들풀이라도 말이지}
시가 꼼지락거리며 나오려고 할 때에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김선우,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중-
* 시스러운 것들의 시시함에 말랑말랑해진 저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