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정원에서
삼십년 상환 저당 대출은 여든이 지나야 다 갚게 되지만 ‘내 집’이기는 한데
한국에 나가있는 몇 해 동안 임대했다가 돌아와서 들어가려니 세입자가 더 있겠다고 한다.
아파트를 빌려 살고 있는 주인에게 비가 샌다, 뭐가 어떻다 해서 몇 번 가보게 되었다.
저런, 저런, 펜스는 개구멍이 뚫리고 지주가 부러진 울바자처럼 되었고
토마토, 가지, 고추, 호박 등을 따던 텃밭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다.
잔디? 그런 게 있었던가? 앞뜰에는 떨어진 도토리들이 여기저기 싹을 틔웠고
뒤뜰은 잡초가 덮었다.
잡초라는 말, “나도 이름이 있으니까 내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그런 아우성 들리는 듯 하고
이문구의 ‘잡초를 위하여’ 아니라도 ‘雜~’에 깃든 모욕에 대신 사과한다는 소신발언들도 많지만
Miscellaneous, 그 외 다수... 뭐 잘못된 거라도?
그렇지만 잡초가 왜 잡초이겠냐고?
있지 않아야 할 자리에 내가 심지 않은 것이 들어와 점유권을 행사하니까 그렇지.
달개비만 해도 그렇다.
예쁘게 봐주면 예쁜 거지만, 에고, 잡초는 잡초.
농사짓거나 잔디 가꾸지 않는 사람은 길가의 달개비를 보며 좋다 하고
그림도 그리고 좋은 렌즈로 접사, 후보정-삽질?-까지 하면 ‘여자의 변신은 무죄’처럼 되는데...
그거 침략군 중에서도 질이 안 좋은 것이라고.
잡아 뜯으면 죽 끌려 나오는 것 같아도
마디마다 뿌리를 내려 한 가닥이라도 끊어져 남은 것이 복수하듯 사방으로 뻗어나가더라고.
아닌 거지. 못된 거지.
{이름 얘기로 곁가지 칠 건 아닌데, 닭의장풀? 그게 뭐야?
{닭장 근처에 많아서라면 달기장풀이라면 될 것을. 설마 닭의 ‘腸’ 닮아서는 아닐 게고.
중국에서는 오리 발자국 같다 하여 鴨跖草(압척초)라 하고 일본에서는 노초(露草)라고 부른다.
학명으로는 Commelina communis, 그게 또 웃기는 것이
화란의 Commelijn 家에 저명한 식물학자 둘과 그들만은 못한 다른 식물학자도 있었다는데
달개비 꽃은 두 개의 (상대적으로) 큰 꽃잎과 투명한 허물 같은 꽃잎이라고 하기도 뭣한 걸로 이루어졌잖아?
그래서 붙인 얘기, 둘은 추어주고 하나는 “에이 뭐 이렇다 할...”로 뭉갠.}
달개비만 아니고 부전나비만한 크기의 작은 꽃들이 만발했다.
비슷해보여도 오체투지하고 눈높이 맞상대하면 다 다른, 꼴에 보랏빛이라, 날 홀리는 보호색?
내가 돌아오면 너희들은 토벌, 일망타진, 발본색원, 완전박멸-더 심한 말 없을까?-이다.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라는 말씀이 들리는 듯.}
Anthony Flew라는 철학자는 ‘버려진 정원’의 비유로 신 존재 증명의 시도를 비웃었다.
-잡초와 엉겅퀴가 무성한 완전개판(complete mess)의 정원을 상상해보라.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이 정원은 사랑하며 보살피는 정원사가 관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저 대혼란을 눈앞에 둔 당신이 반문할 것이다.
“그런 정원사가 있다는 증거라도 있소? 당신이 그를 본 적이 있소?”
그러자 정원사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약간 풀이 죽은 듯, 그래도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
“그분은 드러내지 않기에 아무도 본 적이 없다오. 그래도 존재함은 틀림없소.”
뭐라 하겠는가? “아하, 있기는 있군요. 그럼 부재중? 그러니 돌볼 수 없거나
(챙긴다고는 하나 솜씨로 보건대 그는) 정원사라고도 할 수 없는 최악의...”
그게 참...
예전에 주일학교에서 부르던 ‘어린이 찬송가’ 구절이 그랬다.
-푸른 잔디 꽃밭은 누가 내셨나 보슬비를 주시는 하나님이 내셨지
저 하늘의 새들은 누가 키우나 푸른 숲에 재우는 하나님이 키우지
그래 오는 해에는 내가 돌아온다니까.
그때는 너희들 가는 거야.
그래도 쫄딱 망한 것 같지는 않아.
돌보지 않아도 꽃나무로서의 존재감을 잃지 않은 것들도 남아있고
다시 정주고 가꾸면 또 일어날 것이다.
사랑에는 회복력이 있으니까.
아, 얘기를 달개비로 시작했지.
그게 볼품없는데다가 흔해 빠지긴 했지만 염료, 약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렇게 쓰임새가 있었다, 예전에는.
흔해서 대접받지 못한다면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