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

 

축축한 땅에서 자라는 잡초가 달고 있는 앙증맞은 꽃을 보고 호들갑스럽게 한 마디.

-어머 예쁘다, 저 꽃 이름이 뭐예요?

{예쁘긴 개뿔, 그러나 이럴 때 대비하여 식물도감은 봐둔 터라}

-쇠별꽃, water chickweed, 학명으로 stellaria aquatica, 별꽃과 어떻게 다르냐 하면...

{어쩌면 그렇게 꽃이름조차... 만물박사를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경모(敬慕)에 당황한 척하며 므훗}

 

 

12103001.jpg

 

 

 

도종환 시인이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쓴 시들이 다 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국회의원보다는 상대적으로 지위나 지명도가 낮겠지만 서울시 교육의원이고 해직교사 출신인

김형태 시인이 ‘아버지의 빈 지게’라는 시집을 냈는데

도종환의 추천사가 이랬다.

 

작은 ‘쇠별꽃’을 보기 위해 키를 낮추는 사람이 시인입니다.

꽃의 마음을 읽어 내기 위해 눈과 귀를 여는 사람이 시인입니다.

그래서 그 꽃이 작지만, 작지 않은 꽃임을 알아보는 이가 시인입니다...

 

박재동 화가도 비슷한 말을 했고.

 

‘쇠별꽃’이라는 시는 몇 해 전에 국립공원에서 공모할 때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것인데

{당시 심사위원 중에 한 명이 도종환 시인이었음.}

 

꽃이 지는 소리를 들으러 왔다가

그만 꽃이 되어 버린 별.

 

너의 얼굴을 보려면 앉아야 한다.

너의 눈빛에 입 맞추려면 키를 낮추어야 한다.

너의 마음과 영혼을 읽기 위해선

눈, 코, 입, 귀 모두 활짝 열어야 한다.

 

감히 인간을 숙이게,

끝내 쭈그려 앉게 하는 너.

 

꽃이 지는 소리를 들으러 왔다가

그만 꽃이 되어버린 앉은뱅이별, 앉은뱅이꽃.

 

 

12103002.jpg

 

 

시도, 추천사도 좋은 말이니, 토 달아 초칠 마음은 아니다.

맞아, 낮은 데 핀 작은 꽃을 보자면 숙이고 키 낮춰야지.

사진이라도 찍자면 배 깔고 엎드려야 할 거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쭈그리거나 엎드려서 눈높이로 말을 트고서야 꽃을 좀 안다고 할는지?

그런데 십진법, 미터법으로 친다면 사람은 키 높이인 백 몇 십 센티미터의 시점에서 보는 세계에

익숙해있는 것 아닌가?

화가는 육안으로 본 풍물, 인물, 정물 등을 그리지 않는가?

제한된 수의 과학자들만 천체망원경이나 전자현미경으로 세계를 볼 것이다.

 

 

12103003.jpg

 

 

잘 찍었다는 식물사진, 들꽃의 접사

하모, 잘 찍고말고.

그러나 그 과장됨이랄까, 진상이 허상으로 전도된 걸 보면서 난 감동하지 않는다.

{“히야, 연장 좋네, 포토샵도 정성껏 했어”라고 감탄할지언정.

“고성능 한 대 있었으면...” 칭얼대지 말라고. 모두들 대포 들고 다니긴 하지만.}

 

 

12103004.jpg

 

 

단풍철이니까 곱게 물든 잎 골라 괜찮은 물건 하나 뽑고 싶겠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결함 없는 잎이 없더라고.

벌레 먹었거나, 새똥 파편이 튀었거나, 모서리가 부스러졌거나, 도르르 말렸거나.

“아, 좋다” 떨어져서 보고나 할 소린지?

 

 

12103005.jpg

 

 

 

그 ‘산유화’ 말이지, 그래 쇠별꽃만큼 단순하달까, 뭐 명품 같이 뵈지 않는데...

세상에나~ ‘저만치’가 꺼뻑 죽여주더라고.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꽃이야 발이 달리지 않았으니 저만치 피해갈 게 아니지만

싹튼 데서 자라고 꽃핀 거지 옮겨간 게 아니지만

보는 사람이 ‘저만치’ 있음으로 “아 꽃이구나, 그 꽃 곱네.” 그럴 수 있는 거겠네.

 

누가 가꾼 것도 아니고 봐줄 것도 아닌데, 혼자서, 그러니까 저절로 피어있네.

 

 

12103006.jpg

 

 

흐릿한 풍경, 심도(深度) 깊지 않고 입체감도 없는 사진, 자동노출로 팍팍 찍어댄 것들을 두고

난 지금 ‘저만치’라는 핵심단어를 채택하여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블론드 애인을 두고 자랑을 일삼던 사나이가 내뱉은 푸념.

“온몸이 노란 털로 덮여 꼭 성성이를 안고 있는 것 같더라.”

{나쁜 쉑이.}

{난 꽃의 솜털까지 찍어낸 사진 별로더라고.}

 

 

12103007.jpg

 

 

 

그런데 가까이 가지 않고서는 사랑할 길이 없다? 그러면 어쩌겠냐고?

접근과 밀착의 대가로 환멸을 지불해야 한다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남는 게 낫겠지만

책임질 수 있다면, 그러니까 도덕감의 훼손이라는 수치를 “그건 너 때문이야”로 돌리지 않고

상처를 확인하고 같이 아파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가까이 가지 뭐.

 

가까이 갔다고 붙어 있으라는 게 아니고

가깝지만 또 멀리.

멀어도 아주 멀지는 않고

저만치.

 

 

마침 정민의 ‘一針’을 읽다가

소강절(邵康節)의 글귀 “美酒飮敎微醉後 好花看到半開時”를 발견했다.

괜찮은 술 마시고 가볍게 오르거든 좋은 꽃 반쯤 벙글었을 때에 보러 가기.

 

 

12103008.jpg

 

 

미인은 달빛 내리는 주렴(珠簾) 사이로 보라는 말도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