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계절
버찌 철(le temps des cerises)만 아니고 꽃철도, 단풍 곱다는 때도, 낙엽 날리는 날도 다 그래.
시간은 다 짧아.
선거철도 금방 지나겠지 뭐.
목에서 비린내가 올라오는 건 왜 그럴까?
좀 참지 뭐.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우르르 몰려다니며 이런저런 캠프를 기웃거리는 이들 받아주겠다면
“국민통합을 위해서 과거는 잊어버리기로 하고 이 목숨 다하여...”를 외치는 이들
“鈍馬입니다. 犬馬之勞를 다하겠습니다.” 그러다가 발길질하거나 물지 않을까?
老怪라고 하기가 그래서 다른 말 생각해 보는데, No-愧(부끄러워할 괴)
“이건 아냐, 어그러졌잖아?” 그러면 乖, 속이니 拐, 꼭두각시? 傀, 별거 아닌 덩어리 塊,
중에서 으뜸이랄 만한? 魁, ... 괴기영화에 나오는 좀비들 같아.
욕하지 마.
다 한 땐데 뭐, 메뚜기도, 베짱이도, 꿀벌도.
은퇴한 선수라고 열띤 경기 보면서 피가 끓지 않겠어?
어쩌면 세 선수 다 경제민주화, 제왕적 대통령 권한 축소, 민생, 복지, 통합을 부르짖는지?
하루에도 수백, 수천 차례 악수하기 힘들겠지만
아무나 달려와서 안긴다고 다 안아줄 수 없겠지만
사람 골라 할 수는 없잖겠어?
이선관 시인(1942-2005)이라고 백일해주사 맞고 잘못되어 뇌성마비로 사신 분이 그러시대.
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가령
손녀가 할아버지 등을 긁어 준다든지
갓난애가 어머니의 젖꼭지를 빤다든지
할머니가 손자 엉덩이를 툭툭 친다든지
지어미가 지아비의 발을 씻어 준다든지
사랑하는 연인끼리 입맞춤을 한다든지
이쪽 사람과 윗쪽 사람이
악수를 오래도록 한다든지
아니
영원히 언제까지나 한다든지, 어찌됐든
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
참 참 좋은 일이다.
하모!
플라토닉? 그래도 살과 살이 닿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또 그러셨어. ‘없다’라고.
번개시장에는 번개가 없고,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국화빵에는 국화가 없고,
정치판에는 정치가 없네
병정놀이 같은 것
시늉은 해도 생사의 각오가 안 된.
그러니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나 서울역 대합실이나 프레스센터 앞 지하도에서 하룻밤이라도 자보고 싶어.
{분배정의 같은 걸 말하는 사람들을 좌빨로 몰아 집요하게 괴롭히면서
거리에서 노숙인을 몰아내거나 주폭(酒暴) 검거 캠페인 벌려 ‘좋은 세상 만들기’에 공을 세웠다는
언론사에서 취재 나올라.}
그때 그냥 지나친 게 얼마나 마음에 걸리든지.
어느 날 지나가다가 비교적 깨끗한 종이박스로 지은 이동주택(?)을 발견했는데
공기구멍으로 미인의 눈썹(蛾眉) 같은 초승달과 별 모양을 오려낸 자리가 산뜻, 정교하더라고.
“그 안에 누가 사시는지 한번 뵙시다” 해서 다음날 찾아갔더니 철거됐는지 이동했는지...
재래시장 가서 찬거리 사는 사진 찍었다고 서민의 찌든 삶을 알 수 있겠니?
가난한 아버지가 가련한 아들을 껴안고 잠든 밤
마른 이불과 따뜻한 요리를 꿈꾸며 잠든 밤
큰 슬픔이 작은 슬픔을 껴안고 잠든 밤
소금 같은 싸락눈이 신문지 갈피를 넘기며 염장을 지르는, 지하역의 겨울밤
-박후기, ‘자반고등어’-
큰 아픔이 작은 아픔을, 큰 슬픔이 작은 슬픔을 껴안는!
그게 위에 계신 하느님, 아래 있는 나라님의 존재이유 아니겠냐?
진보가 옳은 것도 아니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이 쬐꼼 더 치사한 건 사실이지만}
옳다고 승리하는 것도 아니니까
이기려고 다투는 이들을 두고 괜찮은 자, 건 아닌 자, 머시기한 자로 나눌 것도 아닌데
어쨌거나 하나는 큰집으로 들어가서 보이지 않겠고
남은별만 둘이서? 울긴 왜 울어... 그럼 뭐 하냐고?
여의도에서 얼쩡거릴 게 아니고
택배, 아파트 경비, 환경미화, 생선가게, 하역장, 온상 같은 데서 일해보라고.
그 수입에 맞춰 살아보라고.
“아 저 사람들 저대로 놔두면 위험한데...” 싶거든
가끔 나가서 한 잔 쏘라고.
{안가 같은 데서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