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녘
미래파라기보다는 황혼파일세.
에이, 파는 무슨, 뭐 주장할 것도 없고 어디 속할 것도 아닌데
나이 이만하니 뵈는 게 그렇고 생각하는 게 그렇다는 얘기지 뭐.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가 오니까
문명이 저물었다든가 국운이 쇠했다고 해서 ‘다음’을 상상할 수 없는 건 아니네만
개체로서야 (내세나 후생이라는 종교적 개념은 논외로 치고) 막판에 이른 것이지.
손 놓겠다는 게 아니네. 마감시간에 쫓기니 정작 바쁠 때는 지금 아닌가?
그야 취재는 다해놓은 거니까 송고(送稿)만 하면 되는데
그대로 보내기가 뭣해서 교정보는 척하며 시간 끄는 것이지.
(에고, 그리 택한 건 아니지만) 난 집도, 자란 집도, 또 지금 사는 집도 서향이고 보니
지는 해만 바라보며 살아온 거라.
그래서 이 꼴이 됐다는 뜻은 아니지만, 욱일승천의 기세가 없었던 게 사실.
째마리에게서 늘품을 찾기야 하겠냐만
이악하거나 애바르지 않게 살아왔으니
늙어 더 부끄러울 건 없네, 노적가리 쌓지 않았어도.
높낮이 뚜렷하지 않은 평평한 땅이라서 꼴깍 넘어가지는 않고
멀리 밀려난 지평선에서 포토타임 서비스로 포즈 잡아주는 해에게 거의 매일 인사한다.
좀 있으면 어둠에 잠길 것들이
빗금으로 내리치는 금실을 맞고 갈흙처럼 누런 기운을 띄고 빛난다.
식별할 수 있으니까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니다.
일찍이 신석정이 그랬다.
저 재를 넘어 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나희덕은 그랬고...
아직은 문을 닫지 마셔요 햇빛이 반짝거려야 할 시
간은 조금 더 남아있구요 새들에게는 못다 부른 노래
가 있다고 해요 저 궁창에는 내려야 할 소나기가 떠다
니고요 우리의 발자국을 기다리는 길들이 저 멀리서
흘러오네요..
-해질녘의 노래 (부분)-
캄캄해지기 전에 돌아가야 하니까 긴 그림자를 밟으며 나아간다.
뛰어갈 필요 없고 도망갈 이유 없다.
집은 息影亭(식영정)이니까.
..어둠의 한 자락까지 따라 들어온다 해도
문틈에 낀 그 옷자락을 찢지는 마셔요 (나희덕)
어둠은 그리움을 달고 들어온다.
소월이 그랬던가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내게 두고는 당신 때문에 저뭅니다”
들왔으면 나갈 일 없으니까
그 사람이야 올 길 바이없는데
발길은 누 마중을 가잔 말이냐
하늘엔 달 오르며 우는 기러기
{김소월, ‘만나려는 심사’ 중)
어떡하겠니? 그런 때니까.
오! 모두 다 못 돌아오는
머언 지난날의 놓친 마음
(김영랑, ‘땅거미’ 중)
놓친 게 그렇고
그리워하는 동안 너는 예뻤다.